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40代 기수' 경쟁했던 이철승, YS·DJ 곁으로

화이트보스 2016. 2. 29. 15:12



'40代 기수' 경쟁했던 이철승, YS·DJ 곁으로

입력 : 2016.02.29 06:09 | 수정 : 2016.02.29 06:12

['7選' 前 신민당 대표 별세]

'민주주의와 반공(反共)'을 일관되게 추구하며 한국 야당사에 중심 역할을 했던 이철승(李哲承·94) 전 신민당 대표가 27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그는 이달 초 감기 증세로 입원하면서 "세월이 하수상하다"고 걱정했으며, 병원에서도 북핵 위기 관련 뉴스를 찾았다고 한다. 죽음을 앞두고 "시국이 엄중한데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러달라"고 당부했다고 측근들은 전했다. 요즘 들어 자신을 '이평(평양과 평창) 주의자'라 칭하면서 "죽기 전에 평양에 가서 냉면을 먹고 (2018년) 평창올림픽에도 꼭 가보고 싶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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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승(오른쪽) 전 신민당 대표가 1978년 6월 당시 김영삼 의원과 국회 외무위에 나란히 앉아 있다. 이 전 대표는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40대 기수론’을 이끌었다(사진 위). 이 전 대표(오른쪽)가 1985년 3월 가택 연금 중이던 김대중 당시 민주화추진협의회 의장의 동교동 자택을 찾아가 조찬에 앞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사진 아래). /연합뉴스

- 民主·反共 함께 추구
박정희정권과 싸우며 안보는 협조
양김측서 비난받은 중도통합론자

전북 전주 출신으로 전주고와 고려대를 졸업한 이 전 대표는 광복 직후 군정기에 우익 학생운동을 이끌며 신탁통치 반대 집회를 주도했다. 정부 수립 이후에는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했으나 이후 3·4·5·8·9·10·12대 국회에 입성하며 7선(選)을 했고 국회부의장도 지냈다. 호는 소석(素石), 본관은 전의(全義).

이 전 대표는 일제강점기 학도병으로 일본 오사카의 병참부대에 배속돼 자살특공대로 차출당했다가 일본의 항복으로 극적으로 귀국했다.

당시 그는 창씨개명에 끝까지 저항하다 조선총독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분류됐었다고 한다. 고려대 재학 중에 전국학생총연맹 위원장으로 반탁(反託), 반공 학생운동의 전면에 섰다. 이 전 대표는 "나의 많은 경력 중에서 전국학련 위원장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기여한 게 제일 자랑스럽다"고 주변에 얘기해 왔다고 한다.

당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눈에 띄어 측근이 되기도 했지만 이 전 대통령이 친일파 출신을 경찰에 채용하자 그 곁을 떠났다. 그럼에도 그는 이 전 대통령을 폄하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선 평생 반대했다.

6·25 전쟁 당시에는 피란 학생 3000여명을 모아 전국학련 학도의용군을 결성해 낙동강 전선을 지키는 데 나섰다. 1951년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병사용 의복과 보급품을 횡령한다는 첩보를 입수해 의혹을 제기했고 이는 사실로 확인됐다.

전쟁이 끝난 1954년 3월 3대 민의원 선거에서 고향인 전북 전주에서 당선돼 정계에 진출했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해 단상에 있던 국회부의장의 멱살을 잡고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항의했던 그는 이듬해 장면의 민주당 신파에 들어가 핵심 인사로 주목받는다.
고(故) 이철승(왼쪽) 전 신민당 대표가 고려대 재학 중이던 1946년 전국학생총연맹위원장 자격으로 이승만 박사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왼쪽 사진). 1954년 11월 최순주 국회 부의장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개헌안을 ‘사사오입(四捨五入·반올림)’ 논리로 가결시키자 이 전 대표(왼쪽)가 단상에 뛰어올라 부의장의 멱살을 잡고 항의하고 있다(오른쪽 사진).

- 이승만에게 발탁
반탁·반공운동 인연, 측근으로
친일파를 경찰 채용하자 뛰쳐나와

5·16 이후 그는 박정희 정권 비판의 최일선에 섰다. 1971년 '40대 기수론'이 내걸린 야당의 대선 후보 경선에서 김영삼·김대중 의원과 경쟁했다. 당시 이철승 48세, 김대중 44세, 김영삼 43세였다. 이들은 "젊고 유능한 정치가들이 정치를 이끌어야 한다"며 바람을 일으켰다.

이 전 대표를 제외한 두 사람은 훗날 대통령이 됐다. 이 전 대표는 2014년 국회보 인터뷰에서 "대통령이 되고 안 되는 것은 대권 주자들의 성격이 많이 좌우하지만 나는 팔자 소관이라고 생각한다"는 소회를 밝혔다.

1972년 유신 이후, 반독재 투쟁을 주장하는 야권 정치인들과는 다른 정치적 노선을 걸었다. 이른바 '중도 통합론'이었다. 박정희 정권과 싸우면서도 안보 면에선 협력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김대중·김영삼 의원 측은 그를 '관제 야당', '사쿠라'라고 규정했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이 전 대표는 "야당은 자유만 외치지 말고 여당이 될 생각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는데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며 "여당에 대해서는 안보를 내세워 자유를 억압하면 안 된다는 지적도 했었다"고 했다. 1976년에는 이런 지론을 앞세워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대표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이후에도 그는 "남북 대치 상황에서 국가의 안보와 개인의 자유는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며 중도 통합론을 유지했다.

- 평양·평창 '二平주의자' 자처
"평양 가서 죽기전에 냉면 먹고
평창올림픽 꼭 가고싶다" 되뇌어

당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주한 미군 철수를 추진하자 야당 대표로서는 이례적으로 직접 미국 상·하원 의원들을 찾아가 "주한미군 철수는 북한의 적화통일 야욕에 말려드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와 함께 미국을 다녀왔던 김수한 전 국회의장은 "이 전 대표는 나와 함께 각지의 미국 대학교 기숙사에서 쪽잠을 자며 미국 의원들을 설득하러 나섰다. 진영 논리를 떠나 나라 전체를 걱정하는 애국심이 대단했다"고 말했다.

1980년대 초반 전두환 대통령의 신군부 출현 이후 정치 규제에 묶여 11대 국회에는 참여할 수 없었지만 1985년 규제가 풀리면서 12대 총선에서 신민당 소속으로 전주에서 다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당시 그는 신민당 이민우 총재와 함께 여당인 민정당 당론과 같은 내각제 개헌을 주장, 야권 주류와 재야의 거센 반발을 샀다.

1988년 13대 총선 낙선 이후에는 자유민주총연맹 총재,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 대한민국헌정회장을 지내며 우파 사회활동에 전념했다. 이 전 대표는 대한체육회장을 지내는 등 체육계와도 인연이 깊었다. 1964년 도쿄올림픽 당시 비행기표를 살 돈도 없었던 한국 선수단을 위해 직접 재일교포를 상대로 모금운동을 벌여 관련 경비를 마련했던 일화는 체육계에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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