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문덕
위지문덕(尉支文德)
시대 | 고구려 |
---|---|
출생일 | 미상 |
사망일 | 미상 |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
고구려는 한반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고구려의 진면목을 이해하기에는 사료가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한민족의 오랜 역사 속에서 한때 만주 벌판을 호령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고구려가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그런데 고구려라는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이름이 있다. 바로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乙支文德)이다. 살수대첩은 612년(영양왕 23) 수(隋)나라의 대군(大軍)이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을지문덕이 이끄는 고구려 군대가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수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한 싸움이다. 을지문덕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출생년도는 물론이고 생몰년도도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난 기지와 용맹함을 가진 인물이라는 사실을 살수대첩이라는 역사적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은 고려 시대에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조선 시대에 안정복(安鼎福)이 지은 《동사강목(東史綱目)》 등에 남아 있는데, 이는 중국의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과 《수서(隋書)》에 기록된 내용을 옮겨 요약한 것으로 내용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조상이 누구인지 집안 내력은 자세하지 않다. 그의 성격은 침착하고 용맹스러우며, 지략이 뛰어나고 글을 지을 줄 알았다. - 《삼국사기》
《삼국사기》에서 을지문덕에 대해 이렇게 전하는 것처럼, 그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사마광이 지은 중국 고대사 《자치통감》에는 을지문덕을 위지문덕(尉支文德)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래서 '을지'가 그의 진짜 성(姓)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조선 후기에 홍양호(洪良浩)가 지은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서는 을지문덕이 평양 석다산(石多山) 출신이라고 밝히고 있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을지문덕에 관한 전설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대부분 그의 남다른 무예와 용맹에 관한 것이다.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주변 여러 민족들과 끊임없이 무력 충돌하면서 영토를 넓히고 통치 기반을 다져 온 나라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무예를 중요하게 여겼다. 전해지는 이야기처럼 젊어서부터 뛰어난 무예 실력을 뽐낸 을지문덕이라면 살수대첩 이전에도 크고 작은 전투에서 큰 활약을 펼치며 대내외적으로 명성을 떨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 고구려의 대응
을지문덕이라는 이름을 후세에 남긴 살수대첩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우선 당시 고구려의 주변 정세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581년(평원왕 23)에 수나라는 400여 년간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통일했다. 그동안 중국의 분열된 왕조 사이에서 외교적 실리를 취해 오던 고구려에게 수나라의 중국 통일은 크나큰 위협이었다. 처음에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도 수나라는 고구려에게 계속해서 신속(臣屬)을 요구했다. 그것은 오히려 고구려로 하여금 수나라에 대한 경계를 더욱 강화하도록 만들었다.
590년(영양왕 1)에 왕위에 오른 고구려의 26대 왕 영양왕은 국방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수나라에 대해서도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598년(영양왕 9)에 말갈족 등과 연합해 수나라의 요서 지역을 먼저 공격했다. 이에 수나라 문제(文帝)는 30만 명의 군사로 고구려를 침략했다. 그러나 수나라의 30만 대군은 임유관(臨愈關)에 이르러 홍수를 만나 고전했다. 마침 장마철이라 강물이 불어나 군량의 보급로가 끊기고, 설상가상으로 역병까지 돌았던 것이다. 평양 근처에 이르러서는 고구려군의 공격에 맥을 추지 못하고 무너졌다. 한편 수군 총관 주라후(周羅喉)는 군함을 이끌고 해상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역시 폭풍을 만나 대부분의 배가 침몰해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수나라의 첫 번째 고구려 침략은 참패로 끝났다. 고구려의 5만 정예부대가 천운(天運)으로 30만의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영양왕은 곧바로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수나라는 일단 고구려의 화친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두 나라 모두 숨고르기에 들어갔고, 표면적으로는 평화로운 시대가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605년(영양왕 16)에 수 문제가 죽고, 그의 아들 양제(煬帝)가 왕위에 오르면서 다시 한 번 두 나라 사이에는 전쟁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양제는 야심 찬 인물이었다. 그는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그리고 만리장성을 새롭게 쌓고 대운하 공사를 하는 등 대규모의 토목 공사를 진행시켰다. 대외적으로는 거란족을 공격하고 돌궐족을 복속시키는 등 주변의 부족들을 수나라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구려에게도 조공을 요구했다. 양제는 영양왕이 직접 입조해 신하의 예를 갖추라고 했다. 영양왕이 이를 거절하자 양제는 고구려를 상대로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했다.
수나라 침략에 응수한 을지문덕의 기지
612년(영양왕 23), 수나라 양제는 100만 명이 넘는 군사를 동원해 고구려를 침략했다. 《삼국사기》에서는 수군의 수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113만 3,800명이니 과장하여 200만이라 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자의 수는 이것의 배(倍)가 되었다. - 《삼국사기》 권 20, 〈고구려본기〉 권 8, 영양왕
수나라 양제는 대군(大軍)을 여러 갈래로 나누어 고구려로 진격시켰다. 양제 스스로 6군을 이끌고, 우문술(宇文述)에게 좌군 12군을, 우중문(于仲文)에게 우군 12군을 각각 이끌게 했다. 하루에 한 군단씩 출발해 전 군단이 모두 다 출격하는 데 40일이나 걸렸고, 늘어선 길이가 천리나 되었다고 한다. 바닷길로는 내호아(來護兒)가 이끄는 수군이 고구려로 향했다.
육로로 진군한 수나라군은 요하에 이르러 고구려군과 대치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필사적인 저항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부교(浮橋)를 만들어 강을 건너는 데만도 며칠이 걸렸고, 고구려의 공격으로 수많은 수나라 군사가 물에 빠져 죽었다. 가까스로 강을 건넌 수나라군은 요동성(遼東城)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지만, 성을 함락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성 밖에서의 싸움에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하다고 판단한 고구려군이 성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항전한 탓이었다. 한편 바닷길로 평양성 근처에 다다른 수나라군은 고구려군과의 싸움에서 크게 패했다.
이처럼 고구려와의 싸움이 교착상태에 이르자 진두지휘하던 양제는 우문술과 우중문으로 하여금 9군을 이끌고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도록 명했다. 우문술과 우중문은 작전 수행을 위해 각각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 근처에 집결했다. 이 소식은 고구려에도 전해졌다. 이때 을지문덕이 등장한다. 을지문덕은 영양왕의 명을 받고 적진에 직접 찾아갔다. 거짓 항복으로 적을 교란하고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수나라군의 입장에서는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고구려군의 수장을 사로잡아 승기(勝氣)를 잡을 절호의 기회였다. 우문술과 우중문은 양제로부터 고구려의 왕이나 장군이 화친을 핑계로 찾아오면 돌려보내지 말고 잡아두라는 명령까지 받아둔 터였다. 그런데 위무사(慰撫使) 유사룡(劉士龍)이 말리고 나서자 이에 흔들린 우중문이 을지문덕을 돌려보내고 말았다. 우중문은 유사룡의 말에 현혹되어 양제의 명령을 어기고 을지문덕을 놓아준 것을 곧바로 후회했다. 그래서 을지문덕을 다시 잡아들이려 뒤쫓았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이미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의 진영으로 무사히 돌아간 후였다.
을지문덕은 이 일로 적의 군사지휘 체재와 군 통솔자들의 자질에 허점이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우중문에게 보냈다.
신기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神策究天文)
오묘한 계책은 땅의 이치를 다했다.(妙算窮地理)
전쟁에서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戰勝功旣高)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란다.(知足願云止) - 《삼국사기》 권 44, 〈열전〉 권 4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5언 고시로 알려진 이 시의 내용은 적장을 조롱하는 것이었다. 실수를 범한 적장의 심리를 자극해 군 지휘부를 교란시키려는 의도였다. 을지문덕의 의도대로 적장들 사이에 분란이 생겼다. 우중문과 우문술은 을지문덕을 놓아준 것에 대한 책임을 서로 전가하기 바빴다. 설상가상으로 준비된 군량마저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평양성을 공략하려던 계획에도 큰 차질이 생겼다. 우문술은 군량 없이는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으니 그대로 돌아가자고 했고, 작전의 책임을 맡고 있던 우중문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전과(戰果) 없이 회군할 경우 양제로부터 문책을 당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결국 우중문의 주장대로 수나라군은 회군을 포기하고 고구려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압록강을 중심으로 다시 한 번 수나라군과 고구려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살수대첩을 대승으로 이끌다
을지문덕은 수나라군을 상대로 싸우다 물러서고, 다시 싸우다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겉으로는 수나라군의 연승이었다. 그러나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을지문덕의 전략은 군량이 떨어져 지친 수나라군을 더욱 지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수나라군은 평양성 근처까지 진군했으나 평양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이때 을지문덕은 다시 한 번 '군대를 물리고 영양왕과 함께 조회하겠다'라는 거짓 항복서를 적진에 보냈다.
적장들은 이를 구실로 서둘러 철군을 시작했다. 그들도 당연히 을지문덕의 계략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미 전의를 상실한 군사들을 이끌고 더 이상의 전투를 진행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평양성 밖에 진을 치고 있던 적군이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을지문덕은 때를 놓치지 않고 역공을 감행했다. 뒤를 쫓아오는 고구려군의 맹공에 행군하던 수나라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결국 살수에 이르러 고구려군의 총공격을 받은 수나라군은 궤멸하고 말았다. 이때 강을 건너지도 못하고 물에 빠져 죽은 수나라 병사가 수만 명에 달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살수대첩이다. 《동사강목》에는 살수대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살수에 이르러 수군이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군이 수의 후군을 추격하니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고, 군사들이 다 괴멸되어 수습할 수 없었다. 장사들은 도망쳐 하룻낮 하룻밤 만에 압록수에 이르니, 450리 길을 간 셈이다. 장군 왕인공(王仁恭)이 후군이 되어 고구려군을 반격해 물리쳤다. 고구려군이 백암산(白巖山)에서 설세웅(薛世雄)을 포위하니, 세웅이 분격해 물리쳤다. 내호아(來護兒)는 문술 등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고, 오직 위문승(衛文昇) 1군만이 온전하였다. 처음 구군(九軍)이 요(遼)에 이르렀을 때에는 30만 5천이었는데 돌아갈 때 요동성에 이른 것은 2천 700인이었다. - 《동사강목》 제3 상
살수대첩의 대승으로 고구려는 수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고 나라의 자존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살수대첩이 과연 수공(水攻)이었는가 의문이 남는다. 현대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종종 살수대첩을 상류의 물을 막았다가 적군이 강을 건널 때 한꺼번에 물을 흘려보내 익사시킨 수공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고구려군이 살수대첩에서 수공을 펼쳤다는 것을 고증할 만한 역사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을지문덕은 거짓 항복으로 적진을 교란하고, 식량이 부족한 적군이 지칠 때까지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며 시간을 끌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후미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 것이다. 막강한 수공이 아니더라도 그 뛰어난 지략과 전술을 충분히 높이 살 만하다.
살수대첩 이후 수나라는 두 차례 더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물러났다. 중국을 통일하고 주변 이민족들을 복속시키며 막강한 힘을 자랑하던 수나라는 그렇게 고구려의 저항에 무릎을 꿇었다. 또한 이것은 수나라의 존립 자체마저 위협하게 되었다. 수십만의 대군을 이끌고 무리하게 고구려 원정 공격에 나선 것이 원인이었다. 나라 안팎으로 흉흉해진 민심이 반란으로 이어졌고, 결국 수나라는 618년 영류왕 즉위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의 역사적 의미와 함께 부활한 민족의 영웅
여러 차례 외세의 침략을 받았던 한반도 역사 속에서 고구려의 항전은 매우 뜻깊다. 특히 을지문덕의 활약은 눈부셨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열전〉에서 을지문덕이 세운 공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양제의 요동 전쟁은 출동 병력에서 전례가 없을 만큼 컸다. 고구려는 한 모퉁이에 있는 조그마한 나라이다. 그런데도 이를 방어하고 스스로를 보전했을 뿐만 아니라 그 군사를 거의 섬멸해 버릴 수 있었던 것은 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춘추 좌전》에서, "군자가 없으면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리오?"라고 했으니, 참으로 옳은 말이다. - 《삼국사기》 〈열전〉 권 4, 을지문덕
고구려에 관한 역사적 기록 대부분이 중국의 기록에 기초한 탓에 고구려를 '한 모퉁이의 조그마한 나라'로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을지문덕을 나라를 지키고 다스릴 '군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에도 살수대첩 이후로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은 우리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전장에서 빛났던 영웅의 모습을 좀 더 많이 접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였던 신채호는 1908년 을지문덕의 전기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을 저술하면서 이러한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을지문덕은 우리나라 4,000년 역사에 유일무이한 위인일 뿐만 아니라, 또한 전 세계 각국에도 그 짝이 드물도다!'라고 표현하며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을지문덕의 의미를 부각시켰다. 역사 속에서 잊혀 가던 을지문덕의 존재를 민족의 영웅으로 다시 부활시킨 것이다.
최근 중국의 동북아 공정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상처 입은 고구려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로 굳건히 지켜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의 영웅 을지문덕의 존재를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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