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고구려의 숨결을 느끼다

주원장(朱元璋)이 천하를 제패한 비결 ⊙ 소작농의 아들, 떠돌이 청년이었다가 홍건적에 가담해 승승장구… 41세에 명나라 건국 ⊙ “주원장은 부지런

화이트보스 2017. 3. 17. 14:04


주원장(朱元璋)이 천하를 제패한 비결

⊙ 소작농의 아들, 떠돌이 청년이었다가 홍건적에 가담해 승승장구… 41세에 명나라 건국
⊙ “주원장은 부지런하면서도 세심하게 일을 처리하며, 또한 과감해야 할 때는 과감하게 나갔다”(오함)
⊙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지 않고 말한 것을 지키며 힘써 일하고 모두 함께 같은 마음으로 협력”
(주원장 자신의 평)
⊙ “명 태조는 성현의 면모, 호걸의 기풍, 도적의 성품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었다”(조익)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역사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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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의 주원장. 추남이었던 그의 모습을 잘 그려냈다.
원(元)나라 지정(至正) 4년(1344년) 찢어지게 가난한 소작농의 막내아들인 한 청년은 돌림병과 굶주림에 부모와 큰형을 동시에 잃고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에 몸을 맡긴다. 행자(行者)가 된 것이다. 그러나 절이라고 그를 따뜻이 맞아줄 리 만무했다. 이에 청년은 떠돌이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글자 한 자 제대로 익히지 못했지만 이때 세상을 보았다. 이미 원나라는 망해 가고 있었고 곡창지대인 남쪽 지방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도적 떼와 반란군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정 12년(1352년) 2월 곽자흥(郭子興)이 호주(濠州)에서 봉기했다. 홍건적(紅巾賊)이다. 어느새 청년은 25세가 됐다. 윤3월 청년은 곽자흥 무리에 일개 병사로 들어갔다. 기억력이 좋아 어깨너머로 배운 글자 수백 자 아는 것이 전부였던 이 청년은 그러나 “계책을 잘 내며 사람을 잘 부렸고 사물을 보는 눈이 정확했다”고 한다. 훗날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 여러 번 밝혔지만 “무엇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반드시 해내는”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배경 없고 지식 없고 외모 또한 전해오는 초상화가 보여주듯 추남(醜男)에 가까웠다.
  
  말단 보졸(步卒)로 홍건적의 길에 들어선 이 청년은 두어 달 만에 원수 곽자흥의 눈에 든다. 중국 학자 오함(吳晗)은 《주원장전》에서 이 무렵 청년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부지런하면서도 세심하게 일을 처리하며, 또한 과감해야 할 때는 과감하게 나갔다. 명령을 받으면 처리가 아주 빨랐으며 마무리 또한 깔끔했다. 전투할 때는 다른 병졸보다 앞장을 섰고 전리품을 얻으면 금은, 의복, 가축, 양식을 가리지 않고 원수에게 바쳤으며 상을 받게 되면 공로는 모두의 것이라고 겸양하며 함께 작전에 나갔던 전우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했다. 평소에는 말수가 적었지만 말을 하면 모두 무게가 실려 있었다.”
  
  
  “말은 어눌하게, 행동은 민첩하게”
  
어질고 지혜로웠던 마황후.
  그는 배워서 이런 것을 익힌 것이 아니라 날 때부터 터득해서 알고 있었다. 공자가 말하는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특히 오함의 묘사는 《논어》 이인(里仁)편에서 공자가 말한 그대로다.
  
  “군자는 말은 어눌하게 하려 하고 행동은 민첩하게 한다[欲訥於言而敏於行].”
  
  배워서 군자가 아니라 타고난 군자가 바로 이 청년이다.
  
  이런 자질을 갖춘 사람은 굳이 출세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미 공자는 제자 자공이 출세하는 법을 물었을 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많이 듣고서 의심나는 것은 제쳐놓고 그 나머지 것들에 대해서만 신중하게 이야기한다면 허물이 적을 것이요, 많이 보고서 위태로운 것은 제쳐놓고 그 나머지를 신중하게 행한다면 후회가 적을 것이니, 말에 허물이 적으며 행실에 후회할 일이 적으면 벼슬자리는 절로 따라오게 될 것이다.”
  
  공자의 말대로 기회는 절로 따라왔다. 자흥에게는 오랜 친구 마공(馬公)이 맡긴 딸이 있었다. 자흥이 친딸처럼 아꼈기에 자흥은 진중에 소문이 자자했던 청년을 불러 사위로 삼았다. 부대 사람들은 청년을 주공자(朱公子)라 불렀고 이름도 원장(元璋)으로 바꿨다. 우리가 아는 주원장(朱元璋)은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이 혼인은 더불어 후덕한 아내를 청년 주원장에게 선사했다. 훗날 마황후(馬皇后)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이 여인은 주원장과 30년을 함께하다가 홍무 15년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런데 병을 앓고 있던 마황후는 혹시 자신의 병으로 인해 의원이 추후에 해를 입게 될까 봐 약을 먹지 않을 만큼 배려심이 깊은 여인이었다. 그래서 주원장은 26명의 아들과 16명의 딸을 낳을 만큼 비빈이 많았지만 황후는 다시 세우지 않았다.
  
  
  도적의 장수에서 호걸로
  
  지위가 오른 주원장은 군관의 기율과 병사의 훈련에 온 힘을 쏟았다. “기본에 충실하자”는 주원장의 이 같은 원칙은 훗날 황제가 돼서도 거의 그대로 유지됐다. 그는 일종의 원칙론자였다. 또한 주원장은 무식했으나 열린 귀를 갖고 있었다. 자신을 낮췄기 때문에 주변에서 좋은 이야기를 해주려는 사람이 많았다.
  
  지정 13년 이선장(李善長)이라는 사람이 그에 관한 명망을 듣고서 찾아와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배울 것을 권했다. 그의 꿈이 군(軍)에서 공을 세워 부귀영화나 누리자는 데 머물렀다면 이런 이야기를 흘려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야말로 고향도 같고 자신과 비슷한 평민 출신으로 봉기한 지 5년 만에 천하를 평정한 인물이다. 게다가 유방은 예부터 중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숭배하는 인물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반란군 혹은 도적 떼의 젊은 군관 주원장은 난세(亂世)를 치세(治世)로 만들어야겠다는 포부를 만들어 가고 있던 중이라 귀가 번쩍 트였다. 즉 그는 단순한 도적의 우두머리에 머물 인물은 아니었고 이때 적어도 호걸이고자 하는 꿈은 품고 있었다.
  
  유방도 한때 난봉꾼에 무뢰배에 가까웠지만 봉기한 이후로는 기강을 세우고 어진 조치를 베풀어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데 주력했다. 게다가 도량이 커서 주변에 다양한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인재를 배치했고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있었다. 고스란히 청년 주원장의 꿈 실현에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오함은 당시 주원장이 유방을 얼마나 흠모했는지를 이렇게 전한다.
  
  “한고조를 모범으로 삼아 말하는 것과 일 처리와 전투 따위의 모든 것에 대해 마음을 기울여 그를 향해 배우고자 했다.”
  
  
  궁예와 곽자흥, 주원장과 왕건
  
홍건적을 일으킨 곽자흥.
  이 점에서 우리는 고려를 세운 왕건(王建)을 떠올리게 된다. 왕건은 후손들에게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내리면서 이렇게 말한다.
  
  “중국의 한고조는 패(沛)에서 일어나 드디어 한나라의 왕업을 성취했다고 한다. 나도 역시 일개 의로운 평민으로서 그릇되게 여러 사람의 추대를 받았다.”
  
  한고조는 왕건의 역할 모델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곽자흥의 복심 주원장과 궁예의 복심 왕건이라는 구도도 흥미롭다. 곽자흥은 여러모로 궁예와 닮았다. 성격이 조급했고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을 싫어했으며 포용력이 없었다. 게다가 일 처리가 느리고 의심이 많았으며 결단력이 없었다. 우리가 아는 궁예의 모습 그대로다. 반대로 주원장은 태생적으로 인내심이 많았고 위아래 사람들과 두루 잘 지냈으며 무엇보다 일 처리가 빠르고 치밀한 준비를 바탕으로 결단에 과감했다.
  
  곽자흥의 졸렬함은 주원장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훗날 황제가 된 뒤에 회고한 뜨거운 만두 사건은 그중 하나다. 괜한 꼬투리를 잡던 곽자흥이 하루는 주원장을 빈집에 가두고 음식을 주지 않도록 명했다. 이때 마부인이 몰래 갓 쪄낸 만두를 가슴에 품고서 남편에게 가져다주었는데 너무나 뜨거워 마부인의 가슴이 데었다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자신에게 날개와 시련을 함께 주었던 곽자흥은 3년 만인 1355년 세상을 떠났다.
  
  이후 주원장은 전장에서 승승장구했다. 장군으로서 주원장은 반간계(反間計)를 비롯한 첩보전에 능했고 전투방식도 늘 신속하게 주력을 집중시킨 다음 적의 약점을 귀신같이 읽어내 결정타를 가하는 것이었다. 또한 동물적 감각으로 정세를 파악하고 전투의 시점과 방식을 주도적으로 결단했다.
  
  
  주원장이 말한 자신의 성공 이유
  
원 말 유력한 군벌 중 하나였던 장사성.
  1364년(37세) 주원장은 오왕(吳王)으로 자립했다. 이제 망해 가는 원나라 관군과 강남에서 경쟁하던 진우량, 장사성만이 그의 상대였다. 훗날 그의 회고는 주원장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마음을 읽는 데 탁월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원 말의 군웅 가운데 장사성과 진우량이 가장 강대했다. 사성은 풍요로운 지방을 갖고 있었고 우량은 군사력이 강대했다. 나는 둘 다 모자랐지만 오직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지 않고 말한 것을 지키며 힘써 일하고 모두 함께 같은 마음으로 협력함으로써 비로소 성공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한과 오 사이에 끼어 있었고 특히 사성이 지리적으로 가까웠으므로 어떤 사람들은 사성을 먼저 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우량은 뜻이 교만하고 사성은 그릇이 작은데 교만한 사람은 일을 잘 일으키나 그릇이 작은 사람은 긴 안목이 없다. 그래서 우량을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하나를 쳐서 동시에 두 개를 얻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실은 이때 그는 이미 천하통일을 자신하고 있었다.
  
  “내가 수십만 대군으로 강토를 굳게 지키고 군정을 밝게 펴며 엄격한 군사 기율을 세워 장수에게 책임을 맡기며 유리한 전투시기를 포착해 차례대로 소멸시켜 간다면 천하통일도 자신할 수 있다.”
  
  허언(虛言)이 아니었다. 불과 4년 후인 1368년 마침내 대명(大明)을 국호로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주원장과 이방원
  
  오직 현장 경험만을 믿었던 황제 주원장은 엄벌주의[以猛治國]의 신봉자였다. 반면 어려서 서당을 다니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었던 그는 황태자만은 최고의 제왕학(帝王學) 교육을 시켰다. 그 결과 황태자는 공자(孔子)와 주공(周公)의 인정(仁政)을 자신의 목표로 삼았다. 이런 황태자가 부황(父皇)에게 간언했다.
  
  “폐하는 사람을 너무 많이 죽이기 때문에 화기(和氣)가 손상될까 두렵습니다.”
  
  다음날 황제가 황태자를 불렀다. 가보니 부황 앞에는 가시투성이의 몽둥이가 있었다.
  
  “들어보거라.”
  
  가시 때문에 붙잡을 만한 곳이 없어 망설이자 황제가 말했다.
  
  “너는 가시가 겁이 나서 들지 못하는구나! 그러니 내가 이 가시를 모두 제거한 다음에 너에게 준다면 어찌 좋지 않겠느냐! 내가 죽인 자들은 모두 천하의 나쁜 사람들이다. 이처럼 깨끗이 정리해야 네가 겨우 이 나라를 맡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조선의 태종 이방원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황태자도 물러서지 않았다.
  
  “위에 요순(堯舜) 임금이 있으면 아래에 요순의 백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황제는 옆에 있던 의자를 들어 황태자에게 집어 던졌다.
  
  일 처리의 주도면밀을 강조하는 면에서도 주원장과 이방원은 닮았다. 실제로 주원장은 얼마 후 황태자가 먼저 죽고 16세 황태손을 세우고서 다시 한 번 가시를 제거한다. 그 결과 자신과 함께 전장을 누볐던 공신은 거의 모두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의 엄벌주의와 좀처럼 사람을 믿지 않는 의심 증세는 문자옥(文字獄)이라는 희대의 사건을 빚어내기도 했다. 자신의 미천한 시절을 연상시키는 글을 올린 사람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죽여버린 것이다. 단적인 예가 광(光)이다. 까까머리를 연상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런 문자옥은 건국 초기 조선 외교를 낭패에 빠트리기도 했다.
  
  
  공이 허물을 덮는 황제 30년
  
황제가 된 후 주원장의 초상. 전형적인 중국 황제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재위 30년에 걸쳐 법에 의한 통치를 가능하게 해줄 대명률(大明律)을 편찬했다. 또한 환관과 외척의 정치 간여를 금지하는 체계를 뿌리내리게 했다. 그래서 어떤 왕조 때보다 환관과 외척의 폐해는 적었던 것이 명나라다. 무엇보다 황제 주원장에게 내려야 할 큰 칭송은 원나라를 내몰고 다시 한족의 중국을 재건한 것이다. 제나라 환공(桓公)을 도와 춘추시대 패권을 장악한 관중(管仲)에 대한 공자의 평이야말로 고스란히 주원장에게 적용돼야 할 명언이다.
  
  《논어》 헌문(憲問)편에서 제자 자공이 불만이 있다는 듯이 묻는다. “관중은 결코 어진 자[仁者]라고 할 수 없습니다. 환공이 공자 규를 죽였는데 함께 죽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환공을 도와주었습니다.”
  
  이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이렇다.
  
  “관중이 환공을 도와 제후들의 패자로 만들어 한번에 천하를 바로잡아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으니, 관중이 없었다면 나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편으로 하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
  
  천하질서를 바로잡은 관중의 공(功)은 공자 규를 따라 죽지 못한 작은 불인(不仁)을 덮고도 남는다는 것이 공자의 판단이었다.
  
  그런데 왜 우리 식자층은 유방, 항우는 말하면서도 주원장은 입에 담지도 않는 것일까? 이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事大)를 표방하면서도 정작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을 폄하했던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의식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주원장은 철저한 왕권(王權)주의자였기 때문에 신권(臣權)을 중시하는 성리학(性理學)을 경멸했다. 관직에 불러 나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다. ‘내 나라에 살면서 내 명(命)을 듣지 않는 자는 그냥 둘 수 없다는 의식’의 발로였다.
  
  주원장에 대한 청나라 사학자 조익(趙翼·1727~1814)의 평가다. “명 태조는 성현의 면모, 호걸의 기풍, 도적의 성품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었다.”
  
  한 자도 고칠 말이 없다.⊙
 
[월간조선 2017년 3월호 / 글=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역사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