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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법 바뀐다" 바짝 긴장한 기업들이성훈

화이트보스 2017. 2. 11. 10:05

"상법 바뀐다" 바짝 긴장한 기업들

이성훈 기자 입력 2017.02.11 03:15 수정 2017.02.11 07:16 댓글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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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권 공격 당하면 속수무책.. 기업 "투기자본 놀이터 된다"]
'대주주 의결권 3%로 제한' 등 상법 개정안 통과 움직임에
재계 "한국적 현실 반영 않고 대선때마다 개혁 내세워 규제.. 표 위해 기업경쟁력 훼손하나"
- 이사회 감사위원 분리선출 논란
대주주 의결권 3%만 인정해 헤지펀드의 이사회 장악 쉬워져
- 집중투표제도 경영엔 치명타
특정 이사 후보에 몰아주기 가능
- 상당수 대기업, 위협에 노출
"소액주주의 권리 보호하고 오너 전횡 막는 취지 좋지만 너무 급박하고 과도하게 진행"

현대자동차는 현대모비스(지분 21%)와 정몽구 회장(5.2%), 정의선 부회장(2.3%)이 주요 주주다. 이사 선임 등 주요 결정을 할 때 이들이 28.5%의 의결권을 행사한다. 하지만 국회에 계류 중인 상법(商法) 개정안들이 통과되면,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일부 이사(감사위원) 선임 때 단일 대주주의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법안도 있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현대차 대주주의 의결권 총합은 8.3%로 떨어진다. 모비스와 정 회장의 지분이 3%만 인정되기 때문이다. 만약 2.9% 지분을 가진 헤지펀드 3곳만 뭉치면(8.7%) 정 회장 등 대주주보다 의결권이 많다. 기존 경영진에 반대하는 다른 소액 주주까지 규합하면, 단번에 현대차 이사회 멤버 9명 중 4명(감사위원)을 장악할 수 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상법 개정안에는 이사 여러 명을 선출할 때 소액 주주들이 특정 후보에게 몰표를 주는 '집중투표제'도 포함돼 있다. 소액 주주가 똘똘 뭉치면, 일반 이사 5명 중 1명도 자신의 몫으로 가져갈 수 있다. 만약 헤지펀드가 작심하고 덤비면 현대차 9명 이사 가운데 감사위원 4명을 포함해 절반 이상(5명)을 장악할 수 있다. 재계 관계자는 "상법 개정안이 그대로 통과되면 현대차 같은 거대 기업도 어느 순간 헤지펀드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재계에서 '상법 개정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지난 9일 국회에서 여야가 전자투표제와 다중대표소송제 등 논란이 됐던 상법 개정안을 2월 임시국회에서 통과시키는 데 합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상황이 더욱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최순실 사태' 이후 반(反)기업 정서가 높아지면서 재벌 개혁을 명분으로 발의된 상법 개정안만도 20여개. 오너의 전횡을 견제하고 소액 주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추진되고 있지만, 현실에선 기업을 '헤지펀드의 놀이터'로 전락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5대 그룹 고위 관계자는 "집중투표제와 근로자 이사제 등이 포함된 채 상법 개정안이 그대로 통과된다면,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기업 하기 어려운 나라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상법 개정안은 최순실 게이트 등으로 인한 '기업 때리기' 분위기 속에서 재계의 반론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채 졸속 추진되고 있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정치인들이 대선 때만 되면 재벌 개혁을 명분으로 각종 기업 규제안을 쏟아낸다"며 "표를 위해 기업 경쟁력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헤지펀드 서너 개 합치면 이사회 장악"

국내 주요 기업 재무팀은 요즘 계열사의 주식 변동 상황을 집중적으로 감시 중이다.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헤지펀드의 공격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감사위원 선임 때 대주주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것은 기업 경영에 실질적 위험이 될 수 있다. 감사위원은 '재무 상태에 대한 조사권과 영업보고 요구권' 등 다른 일반 이사보다 더 많은 권한을 갖는다. 회사 경영과 관련한 비밀스러운 부분도 들여다볼 수 있다. 헤지펀드가 기업의 약점을 찾아 공격하도록 돕는 '첨병'이 되는 셈이다.

현대차뿐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 대표 기업이 이런 위협에 노출돼 있다. 야당이 제안한 상법들이 통과되면 감사위원 선임 때 삼성전자(19.6%)를 비롯한 특수 관계인 지분이 20.4%인 삼성SDI 대주주 의결권이 단 3.9%로 제한된다.

㈜SK와 LG전자도 마찬가지다. ㈜SK는 최태원 회장(23.4%)과 최기원 이사장(7.4%) 등 특수 관계인 지분이 30.9%이지만, '3% 룰'에 묶이면 의결권이 6%로 떨어진다. 지주회사인 ㈜LG가 지분 33.7%를 가진 LG전자도 대주주 의결권이 3%에 불과하다.

재계는 헤지펀드들이 자신을 대변할 감사위원을 선임한 후 배당 확대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재계 관계자는 "최근 새 투자처를 찾지 못해 현금을 쌓아 놓은 국내 대기업 상당수가 고액 배당을 노리는 해외 투기 세력의 집중 공략 대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은 지난해 10월 삼성전자에 대해 30조원의 특별배당을 요구했었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10일 경영자총협회가 주최한 연찬회에서 "외국 헤지펀드들의 공격에 의한 국부 유출 등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상법 개정안 중 '근로자이사제도'는 우리의 노사 관계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다. 이 제도는 노조 추천 후보를 의무적으로 사외이사에 선임하는 것이다. 상법 개정안 지지자들은 "근로자를 경영에 참여시키면 오너의 전횡이 줄어들고, 경영 투명성도 강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재계는 "이는 이상론(理想論)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현대중공업은 2015년 영업손실이 1조5000억원에 달할 정도로 극심한 불황을 겪었다. 하지만 노조는 작년부터 임금 협상에서 '성과급 250%와 사업부 분사 철회' 등을 요구 중이다. 이경상 대한상의 경제조사본부장은 "지금도 기업은 강성 노조 때문에 구조 조정을 못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상법 개정안에 포함된 '다중대표소송제'는 기업의 투자 활동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이는 모(母)회사 주식 1% 이상 가진 주주라면, 자(子)회사 이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제도다. 자회사가 의욕을 갖고 진출한 신사업에서 성과를 못 냈다가는, 모회사 주주로부터 소송을 당할 수 있다. 자회사로선 대규모 투자 때, 모회사 주주의 눈치까지 봐야 하는 것이다.

"기업들 성장 회피… 투자자 통해 경영 투명성 확보해야"

재계도 분식회계와 편법 상속 등을 막기 위한 상법 개정에는 공감한다. 하지만 최근 움직임은 '너무 급박하고, 너무 과도하게' 진행되면서 기업 경쟁력을 심각하게 훼손시킬 수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신장섭 싱가포르대 교수는 "공정거래법 등 우리나라의 재벌 규제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다"면서 "이제는 정치권이 기업 경쟁력도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에선 상법 개정안이 기업의 투자와 성장 의욕을 꺾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상법 개정안은 '자산 2조원 이상 상장 기업'을 대상으로 한다. 헤지펀드들과 과도한 마찰을 피하기 위해 기업들은 상장을 꺼리거나, 장기 투자 대신 배당 확대에만 골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석훈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실장은 "국민연금 등 주요 주주인 기관투자자들이 실질적으로 경영을 감시하는 방식으로 기업들의 자발적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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