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 영산을 통하는 관문- 네팔
히말라야에 빠진 사람은 비단 전문 산악인만은 아니다. 보통사람은 산 정상에 설 수도 설 이유도 없지만 히말라야에 중독된 사람들은 그저 산자락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이달에는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 히말라야의 나라 네팔을 소개한다.
히말라야에 안겨 살아가는 사람들
소설가 박범신은 오래전부터 자신이 히말라야에 중독돼 있다고 고백했다. 히말라야를 통해서 ‘곧 늙고 병들고 죽을 텐데’ 하는 오랜 내면의 고통을 덜어내게 된 것이다. 꿈에도 가끔 히말라야가 보인다고 했다. 히말라야에 빠진 사람은 박범신뿐 아니다. 「가르왈 히말라야」 등 히말라야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쓴 의사 임현담도 16년째 히말라야를 찾고 있다. 히말라야를 가슴에 채워오기 위해 1년에 서너 달은 병원마저 비운다. 시인 김홍성은 한때 히말라야 기슭에서 산장까지 운영했다.
혹시 주변 사람 중 휴대전화 번호 끝자리가 8848이라면 그 역시 히말라야에 빠져 있는 게 확실하다. 8848은 에베레스트의 높이다.
왜 히말라야에 가는가? 말로니의 말처럼 ‘산이 거기 있으니까’. 대답이 너무 철학적이다. 아마도 말로니의 말뜻은 당신도 히말라야에 가봐야 안다는 의미다. 보통사람은 산 정상에 설 수도 없고 설 이유도 없다. 그저 산자락에서 히말라야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네팔은 히말라야의 관문이다. 에베레스트에서 안나푸르나까지 8000m급 봉우리가 8개, 6000m가 넘는 산은 네팔에만 1천3백10개나 된다. 일반인을 위한 트레킹 코스도 있지만 이번에는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 곳’만 소개하겠다.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 연봉이 빤히 올려다보이는 포카라다.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향하는 길. 비행기편도 있지만 육로를 택했다. 산뿌리를 더 만지고 밟고 싶어서다.
네팔의 고속도로는 산길이나 다름없다. 수도 카트만두가 해발 1350m. 지리산 노고단보다 조금 낮다. 여기서 뻗은 길은 벼랑길이 많다. 도로는 직각으로 뿌리를 박은 산의 허리쯤에 걸려 있다. 산과 산이 모두 한 뿌리로 이어져 있어 앞산 허리를 끼고 돌면 뒷산 자락으로 길이 열린다. 미시령이나 한계령, 동강협곡 같은 산길이 130km가 넘는다. 게다가 우기가 지나면 낙석이 길에 떨어져 곳곳이 공사 중이다.
차량으로 떠나는 포카라 길은 불편하다. 벼랑길을 달려야 하는데 리무진 같은 좋은 차가 있을 리 없다. 출고된 지 10~20년의 고물버스면 족하다. 게다가 사이드 미러까지 떨어져
나가 경음기로 신호를 하며 절벽길을 달린다. 처음 이 길을 달려본 사람은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그런데도 요리조리 차를 피해가며 달리는 네팔 운전사들의 솜씨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렇게 위험하고 가슴을 졸여야 하는 벼랑길이지만 히말라야에 안겨 살아가는 네팔의 속 모습을 마주할 수 있어 여행자들에겐 외려 흥미진진하다. 만약 산을 더 후벼 파내고 탄탄대로를 깔았다면 오히려 가슴이 아렸을 것이다.
벼랑길이라도 결코 날카롭거나 두렵지만은 않다. 칼 같은 능선에 옹기종기 앉아 있는 다락논이 오히려 연민을 느끼게 한다. 산봉우리부터 계곡 아래까지 수백 개 계단으로 이뤄진 층층논. 척박한 산자락에서 한 뼘 땅도 놀리는 법이 없다. 산악국가 네팔은 국토의 16%만 경작지. 전 인구의 94%가 농민이다. 농산품이 국민 총생산량의 61%, 수출량의 75%다. 그렇게 산에 기대 살아도 한 달에 수십 달러도 못 번다는 세계 10대 최빈국이지만 까맣게 그을린 어린아이와 농부의 눈동자는 거대한 설산을 담을 만큼 맑다.
“왜 히말라야에 가냐구요? 한 번만 다녀오세요!”
한 꺼풀씩 산을 돌아가서 만난 포카라는 네팔 최고의 관광 도시다. 산악인과 트레커는 물론 관광객들까지 모여 연중 북적거린다. 호텔이나 카페도 카트만두보다 시설이 좋다. 왜 이런 관광 도시에 국제선 직항편이 없을까? 현지인들은 포카라에만 관광객이 몰리면 카트만두 경제가 몰락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포카라는 한때 인도와 티베트를 연결하는 번창한 중개무역 도시였다. 요즘은 히말라야 등산과 트레킹을 시작하는 서쪽 출발점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트레킹 코스만 무려 50여 개나 된다.
트레킹은 버겁지 않다. 길도 날카롭지 않고 편하다. 산에 들면 산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그래도 히말라야를 밟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산에 들지 않아도 광대무변한 히말라야 연봉을 볼 수 있는 곳은 사랑코트다. 사랑코트는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 연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빼기. 히말라야 전망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설산을 볼 수는 없다. 히말라야를 볼 수 있는 때는 1년에 40일 뿐이다.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가 가장 청명하다. 현지인들은 산이 품을 열어야 오를 수 있고 산이 허락해야 볼 수 있다고 했다.
산 날씨는 아무도 모른다. 비구름이 몰려오다가 갑자기 맑아지기도 한다. 어쨌든 운무를 찢고 청명한 하늘을 향해 솟은 안나푸르나 남봉(7219m), 마차푸차레(6993m), 안나푸르나 2봉(7397m)의 모습은 장관이며 경이롭다.
사실 그 산봉우리를 보고 나면 왜 히말라야에 가는지 알 것 같다. 태양을 향해 쳐든 창검처럼 빙설로 덮인 능선이 햇살을 퉁겨내며 번쩍거리고, 설산과 푸른 들판이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산봉우리 하나가 이렇게 웅장할 수 있을까 싶다. 전세계를 떠돌던 여행자들이 꼭 가봐야 할 마지막 코스로 히말라야를 꼽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사랑코트에서 바라본 산줄기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마차푸차레다. 여행자들은 K2나 안나푸르나 같은 8000m급 봉우리가 최고라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네팔 사람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산은 마차푸차레(6993m)다. 마차푸차레는 물고기 꼬리(Fish Tail)란 별명이 붙은 정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산악인 중에 슬그머니 마차푸차레를 ‘도둑산행’한 사람이 있다고도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미답봉이다. 네팔 정부가 마차푸차레만은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 힌두교도들에게 가장 추앙받는 신 시바와 부인 파르바티가 살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생김새는 마차푸차레가 훨씬 신비롭다. 안나푸르나는 마차푸차레보다 더 높지만 봉우리가 뭉툭하다. 안나푸르나는 ‘곡식이 가득 찬 곳’이란 뜻이다. 안나푸르나는 현대 등반사에서 의미 깊은 봉우리다.
안나푸르나 주봉(8091m)은 인류가 최초로 성공한 8000m급 설산. 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 에르조그 팀이 등정에 성공하면서 히말라야 붐을 일으켰다. 하지만 한국 산악인들에게는 아픔의 기억이 더 짙다. 국내 여성 산악인으로는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했던 지현옥이 99년 안나푸르나에서 추락사했다. 히말라야 14좌 등정 대기록을 세운 엄홍길도 5차례의 도전 끝에 등정한 산이다.
사랑코트에서 바라본 안나푸르나도 장관이지만 포카라의 페와 호수에서 보는 안나푸르나가 아름답다. 페와 호에 비친 안나푸르나는 히말라야 관광 엽서나 사진첩, 포스터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명소다. 하늘만큼 푸른 호수에 비친 설산의 모습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포카라라는 이름도 실은 호수를 뜻하는 ‘포카리’에서 나왔다고 한다.
네팔에서 산악인들을 만날 때마다 무던히도 물어봤다. 왜 히말라야에 가는가? 젊은 산꾼의 대답이 번개처럼 가슴을 찔렀다. “한 번만 다녀오세요….” 지금은 왜 산에 가는지 알 것 같다. 왜냐고 딱 말할 수 없는 게 히말라야다.
네팔의 독특한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고대도시
히말라야의 나라 네팔은 흔히 문명과는 떨어져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네팔 사람들은 독특한 문화를 일구며 살아왔다. 인도에서 전해진 힌두 신앙에 히말라야의 토속 신앙이 접목됐다.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고대도시 박타푸르다. 박타푸르는 카트만두 중심가에서 16㎞ 떨어져 있다. 고대에는 카트만두, 파탄 왕국과 함께 3대 왕국 중 하나. 18세기 고르카의 나라얀 샤 왕이 통일전쟁에서 승리, 네팔에 복속됐다.
박타푸르는 민속촌 같다. 연 날리는 아이들, 염소를 끌고 나온 아낙네, 골동품과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 영락없이 17∼18세기 무렵의 네팔 왕국으로 건너온 것 같다. 키애누 리브스 주연 영화 ‘리틀 붓다’도 여기서 촬영했다. 면적은 16km2.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박타푸르는 크게 타우마디 탈 주변 광장과 달발광장 등 2개의 광장으로 나뉘어 있다.
타우마디 탈 주변에서는 5층짜리 나타폴라 힌두 사원이 가장 웅장하다. 1702년에 지은 이 사원은 네팔에서 가장 높은 30m 높이의 건물. 대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다. 1층 계단에는 사람, 2층 코끼리, 3층 호랑이, 4층 스링어(힌두 신화 속의 짐승), 5층 계단에는 바이라마(힌두의 신) 석상이 정교하게 제작돼 있다.
GNP나 GDP 수준으로 문명의 잣대를 들이대려는 사람들은 대체 이렇게 가난한 나라가 이런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 게 이해가 안 될 것이다. 프랑스인들이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를 봤다는 선교사들의 목격담을 거짓말이라고 단언해버린 것처럼 말이다.
힌두문화를 엿볼 수 있는 독특한 사원도 많다. 파괴의 신 시바, 부인이 1만6천 명이나 됐다는 크리슈나, 용맹을 상징하는 두르가, 지혜의 신 가르샤, 얼굴이 코끼리인 시디락슈미 등 사원마다 다양한 힌두신이 새겨져 있다. 네팔의 건축물들은 중국과 많이 닮았다.
아르준이라는 카트만두의 고등학교 교장은 8세기 이후 고대 중국으로 끌려간 네팔인 기술자들이 중국에 영향을 많이 줬기 때문이라며 네팔 문화의 우수성을 은근히 강조했다. 실제로 네팔의 고대 사찰은 규모가 크고 웅장해서 관람객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마치 조선 도공이 일본 도기문화에 영향을 끼친 것처럼 네팔인들의 고대 건축술은 중국이 탐낼 정도로 유명했다.
스와얌부나트는 히말라야에 뿌리 내린 카트만두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다.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3세기쯤 만들어졌다고 한다. 카트만두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스와얌부나트는 원래 불교사원. 힌두교도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힌두교에서는 부처도 수많은 신 중 하나로 믿기 때문이다. 스와얌부나트는 카트만두에서 가장 이름난 관광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는다.
평민들은 스투파(불탑)를 찾아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한 뒤 경전이 새겨진 마니차를 돌린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평민들은 마니차를 한 번 돌리면 경전을 읽는 것과 똑같은 지혜를 얻는다고 믿는다. 탑돌이를 하는 순례자의 모습은 경건하다.
사원 한가운데 두 눈이 그려진 스투파가 서 있다. 스와얌부나트 사원의 상징으로 카트만두 관광 포스터에 자주 등장하는 명소이다. 두 눈은 지혜를 나타낸다고 한다. 시내의 쿠마리 사원도 이채롭다. 쿠마리는 생리를 하지 않은 어린 소녀를 뽑아 여신으로 섬기는 것. 16세기에 유래했다. 생리를 하기 시작하면 쿠마리는 사원에서 쫓겨나고 새로운 쿠마리를 추대한다. 이 밖에 시바 신을 모신 파슈나트,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은 보다나트, 고대도시 파탄 등 유적지들이 많다
지금은 초라하고 허름한 카트만두. 거기도 한때 히말라야 산문화권의 중심이었다.
여행수첩
직항편은 없다. 중국의 상하이나 방콕을 거쳐 들어간다. 상하이까지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가 매일 출발한다. 상하이에서는 일주일에 두 차례 로열 네팔 항공이 들어간다. 상하이까지는 1시간 30분, 상하이∼네팔은 5시간 정도 걸린다. 시차는 한국보다 3시간15분 느리다. 국가간의 표준시간은 30분이나 1시간 단위로 나뉘지만 인도와 분쟁을 겪은 뒤 국가적인 자존심을 앞세워 인도보다 15분 빠르게 조정했다고 한다. 8월 말부터 이듬해 5월까지는 습도가 낮고 비가 많지 않은 건기다. 우리나라 가을 날씨와 비슷하다. 비자는 현지에서 받아야 한다. 미국 달러만 받는다. 30달러. 여권용 사진 2장이 필요하다. 현지에서 폴라로이드로 찍어주기도 한다. 2달러. 출국할 때는 공항이용료 16달러를 내야 한다.
네팔의 화폐는 루피. 미국 달러를 현지에서 루피로 바꿀 수 있다. 1US달러=70~80루피. 환전을 할 때는 큰돈을 바꿀 필요가 없고 영수증을 꼭 챙겨둬야 한다. 재환전시 영수증에 적힌 금액의 15%만 다시 미국 달러로 바꿔준다. 웬만한 호텔과 식당, 쇼핑센터에선 미국 달러를 받는다.
글·사진 / 최병준(경향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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