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역사에서 배운다/티베트

고비사막엔 '전설의 보물성'이 있다

화이트보스 2008. 10. 5. 19:39

 

 

 

 

 

 

 

 

 

 

고비사막엔 '전설의 보물성'이 있다





 

▲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서하왕릉의 릉탑. 릉탑은 본래 7층의 목조건물이 외관을 아우른 구조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천 년 전 중국 서북부에 한 제국이 건국됐다. 오늘날 중국 닝샤(寧夏)회족자치구의 수도 인촨(銀川)에 도읍을 정한 제국은 쓰촨(四川)성에서 활동하던 유목민 탕구트족(?項族)이 세운 나라였다.


제국은 끝없이 펼쳐진 사막과 황무지를 개척하고 실크로드의 중계무역을 장악하며 2세기 동안 번성했다. 동북으로는 거란이 세운 요나라 및 여진족의 금나라, 동남으로는 송나라와 중국 대륙을 삼분했던 제국, 바로 '대하'(大夏)였다.


7세기 중국 대륙에는 일대 격변이 일어났다. 오랜 분열의 시대를 종식시킨 수나라는 무리한 고구려 원정과 잇단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면서 쇠망의 길을 걸었다. 수를 멸망시키고 흥기한 당나라는 장안(長安)을 수도로 삼고 서역의 고창국과 북방 초원의 돌궐을 정복하면서 영토를 늘려갔다.


티베트 고원에서는 걸출한 영웅 송첸감포왕이 나타나면서 분열된 부족들을 잇달아 통합해갔다. 송첸감포가 세운 토번(吐蕃)이 날로 강성해지자, 티베트 계열의 종족으로 쓰촨성 송판(松藩) 일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탕구트족은 생존을 위한 엑소더스를 감행했다.


고향을 떠난 탕구트족은 100여 년 동안 간쑤(甘肅)성을 거쳐 산시(陝西)성 북부에 정착했다. 탕구트의 수령 중 한 명인 탁발사공(拓跋思恭)은 황소의 난 때 당이 장안을 탈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워 당 황실의 성인 이(李)씨를 하사받았다.


당 말기에 접어들며 독립된 지방세력으로 성장한 탕구트족은 오대십국시대를 거치면서 국가의 틀을 갖춰갔다. 11세기 초 탕구트의 족장 이원호(李元昊)는 여러 부족을 통합하면서 송나라의 행정조직을 모방해 독자적인 관료제도를 정비했다. 1028년 송의 대군을 격파한 이원호는 1036년에는 고유 문자까지 창제했다.


1038년 이원호는 송과 맺은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면서 스스로 황제임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국호인 대하는 중국 최초 왕조인 하(夏)를 계승한다는 뜻으로, 송은 자신의 영토 서쪽에 있다하여 '서하'라 불렀다.


서하의 건국을 인정치 않은 송은 대군을 출병시켜 전쟁을 일으켰다. 1040년 삼천구(三川口), 1041년 호수천(好水川), 1042년 정천(定川) 등의 전투에서 잇따라 대승한 서하는 화의를 요청했다. 대하와 요의 동맹을 우려한 송에서 이를 받아들여 1044년 평화조약이 체결됐다. 서하는 송에 신하의 예를 취하는 대신 송으로부터 매년 은 7만2000냥, 비단 15만3000필, 차 5만근 등을 받고 국경 무역장을 개설, 교역하는 막대한 실리를 얻은 조약이었다.



 

▲ 서하왕릉 박물관에 전시된 개국황제 이원호의 밀랍 인형.



 

▲ 서하왕릉 박물관에 전시된 서하문자 창제규칙도. 6000여 자가 만들어진 서하문자는 한자에 한자 획수를 더한 형태였다.



 

고유문자 창제하고 실크로드 무역로 장악해 번성한 제국

서하는 면적이 한반도의 5배나 되는 거대한 제국이었다. 영토는 오늘날 동으로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바이터우(包頭), 서로는 간쑤성 위먼관(玉門關), 남으로는 란저우(蘭州), 북으로는 중·몽 국경선에 달했다.


송과 서역의 중간에 위치한 덕분에 서하는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교역을 장악했다. 서하는 중계무역로를 독점하여 세력을 크게 넓히고 국력을 키워나갔다. 송과 활발한 교역을 통해 서하는 한족과 농경 문화를 적극적으로 흡수하여 탕구트와 유목 문화에 접목, 발전시켰다.


건국 초기만 해도 송의 관제를 모방했던 서하는 차츰 고유의 체제로 정비했다. 관직은 크게 문·무관에 상사, 중사, 하사 3계급으로 나뉘었다. 4부, 11주, 7군, 6현, 8진의 지방행정조직을 설치하여 제국을 원활히 통치했다.


서하 문자로 쓰인 < 천성구개신정금령 > (天盛舊改新定禁令·1149), < 광정임신신법 > (光定壬申新法·1212), < 저년신법 > (猪年新法·1215) 등 법전은 서하가 고도의 통치체계를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서하는 불교를 국교로 정해서 승려를 교육, 배출시키는 화상공덕사와 출가공덕사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각지에 사찰을 건립했다.


서하어는 티베트-미얀마 언어 계통으로, 중국어와 문법·발음 체계가 전혀 다르다. 서하문자는 6000여자가 창제됐는데, 한자에 한자 획수를 더한 문자로 어떤 자수는 40획이 넘기도 했다. 서하문자는 서하가 멸망한 이후에도 16세기 초까지 쓰여 240년 동안 생명력을 유지했다.


서하는 문자 보급을 위해 각자사(刻字司)라는 인쇄국을 두어 음운과 단어를 정리한 교과서 < 운서 > (韻書)를 출판했다. 제국 곳곳에 설립된 학교에서는 서하어로 번역된 중국 고전 < 논어 > , < 맹자 > , < 사기 > 등이 가르쳐졌고 각종 불경 교육도 이뤄졌다.


국교가 불교였던 서하는 수많은 불교 미술 작품을 남겼다. 찬란한 서하의 불교 예술은 카라호토(黑水城)에서 발굴된 불상·불화·불탑 등에서 잘 나타난다. 고비사막에 은빛 사토로 지어진 아름다운 성 카라호토는 실크로드 거점도시로 동서양의 온갖 진귀한 보물이 가득 찼었다.


1908, 1909년 두 차례에 걸쳐 카라호토를 찾은 러시아 코즐로프탐험대는 수십 점의 불상, 500여 점의 불화, 2만4000여 점의 고문서를 발굴했다. 코즐로프는 지인에게 "보존이 완벽한 고대 도서관을 발견했다"고 편지를 써서 보낼 정도였다. 한낱 퇴역군인이었던 코즐로프는 카라호토 발굴을 통해 세계 고고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



 

▲ 서하왕릉에서는 다량의 벽화도 발견되고 있다. 대부분 국교였던 불교의 경전 내용을 묘사한 것이다.



 


 

▲ 서하왕릉에서 발굴된 인두신조는 서하가 티베트 밀교까지 받아들인 다원적인 문화였음을 보여준다.



 

찬란한 서하 문명을 보여주는 보물창고, 카라호토·서하왕릉

인촨에서 25㎞ 떨어져 있는 서하왕릉은 서하의 찬란한 문명을 보여주는 역사 현장이다. 서하왕릉은 1970년대에 측정과 조사가 시작되어 30여 년 동안 대대적인 발굴이 진행됐다.


서하왕릉은 허란(賀蘭)산 동쪽 기슭 황량한 사막에 위치해 있다. 50㎢ 되는 면적에 모두 9곳의 황제능원과 200여 채의 귀족 무덤이 있다. 서하왕릉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왕릉 중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베이징의 명십삼릉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서하왕릉의 황제릉은 각기 독립된 건축물이다. 왕릉은 북쪽에 앉아 남쪽을 향하고 있고 네모꼴로 제전, 내성, 외성, 전대의 계획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릉탑은 거대한 흙덩이가 봉분처럼 솟은 팔각추 모양으로 지하에는 계단 모양의 통로가 있고 가장 큰 직경은 34m에 달했다.


릉탑의 윗면은 5층과 7층 겹겹 구조로 된 목조건물로, 중국 내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다.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릉탑에서는 서하 문화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수많은 유물과 부장물이 출토됐다.


9곳의 서하왕릉 중 3호 능원은 부지가 가장 크고 잘 보존된 황제릉이다. 개국황제 이원호릉으로 추정되는 3호 능원에서는 조형이 완벽한 사람의 얼굴에 새의 몸을 한 '인두신조'(人頭神鳥)가 발견됐다.


인두신조는 불경에 기재된 '쟈릴핀가'로, 히말라야산맥에 살며 묘한 울음을 낸다는 전설상의 새. 한자로 번역하면 '묘음새'라 불리는 인두신조는 불교 극락세계를 횡보하는 새로 서하의 건축물에는 모두 장식돼 있다. 3호 능원에서는 북방유목문화의 형태를 보여주는 도깨비 형상을 한 남녀 조각의 주춧돌도 발굴됐다.


현재까지 서하왕릉에서는 14만 점의 기와 등속, 200점의 건축장식 그리고 각종 문화재가 출토됐다. 작년 9월 발굴이 마무리된 6호 능원에서는 금수 무늬 장식의 암막새와 와당, 치미, 망새 등도 쏟아져 나왔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서하왕릉이 고대 한족 황실능원의 장점을 흡수하면서 불교건축을 융합하고 탕구트와 북방유목민족의 전통을 더한 독자성을 창조했다고 인정했다. 붉은 벽과 석회 기와로 장식한 왕릉 성벽 구조는 서하 황실의 장중하고 웅대한 기질을 잘 보여주기도 한다. 서화왕릉은 중국 전통문화와 차별되는 서하문화의 보물창고인 셈이다.


 


▲ 인촨 도심에 있는 청톈스(承天寺)탑은 1050년에 지어진 11층, 64m의 서하시대 벽돌탑이다. 18세기 지진으로 파괴된 것은 1820년 다시 지은 이 탑은 서하의 뛰어난 건축술을 보여준다.


 

 



 

▲ 번영을 누렸던 서하도 용맹한 몽골군 침입에는 어쩔 수 없었다. 서하와 벌인 전쟁에서 칭기즈칸이 사망하자, 몽골군은 서하에 대한 무자비한 파괴와 학살을 감행했다.



 

몽골군에 멸망당한 서하, 중화민족 블랙홀에 사라진 탕구트

서하는 동서문화의 영향을 고루 받아들여 중국의 유교, 티베트의 밀교, 서방의 이슬람 문화까지 흡수한 고도의 문명을 창조했다. 독자적인 문자와 문명을 꽃피운 유목왕조는 동아시아 역사에서도 그리 많지 않다.


개국황제 이원호에서 마지막 황제 이현까지 서하 황실은 10대에 걸쳐 번영을 누렸다. 서하제국은 실크로드 무역로를 장악하고 영화를 누렸지만 13세기 들어 강대해진 몽골 칭기즈칸의 위협에 직면했다. 1206년 몽골을 통일한 칭기즈칸은 유목민 부족을 재편하고 서하에 침입했다.


서하는 제국 유지를 위해 몽골에 충성을 맹세하고 황제의 딸을 칭기즈칸과 혼인시켰다. 몽골과 함께 금에 대한 전쟁도 벌여나갔다. 그러나 금나라를 상대로 한 오랜 전쟁은 서하의 국력을 쇠약하게 만들었고, 이에 1226년 칭기즈칸의 서정 참가를 거부했다.


1227년 칭기즈칸이 직접 이끈 몽골군은 서하를 침공했다. 서하는 몽골 대군에 강력하게 저항했는데, 칭기즈칸은 전투 중 사망했다. 칭기즈칸은 죽으면서 "(서하인을) 섬멸하고 하나도 남기지 말라. 멸망시키고 죽여 버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칭기즈칸 유언처럼 몽골군은 서하인을 철저히 도륙했다. 후대 사서는 "성곽은 불태워졌고 주민은 닥치는 대로 살해되어 백골이 사방에 널렸고 수천 리가 황폐해졌다"고 기록했다.


처절한 파괴와 학살은 오랫동안 서하의 존재를 역사에서 사라지게 했다. 근세기 들어 발굴된 서하왕릉, 카라호토의 유적을 통해 서하는 다시금 빛을 발하게 됐다. 카라호토 일대에서는 칭기즈칸 대군에 결사 항전했던 흑장군 바텔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져온다.


수적으로 절대 열세였던 흑장군은 성문을 굳게 잠그고 성을 포위한 몽골군에 거세게 저항했다. 쏠 화살이 다 떨어지자, 성안의 맷돌까지 깨어 성벽을 타고 오르는 몽골군에게 퍼부었다. 3차례에 걸친 진공전에 실패한 칭기즈칸은 성안에 흐르는 강물을 막아 수원을 없애버렸다. 최후를 예감한 흑장군은 성안 모든 보물을 빈 우물 속에 던지고 처자식까지 죽인 뒤, 남은 군사를 이끌고 성 밖에 나가 전투를 벌였다. 아름다운 카라호토 성이 불타오르는 광경을 보면서 흑장군은 저주의 외마디를 남기고 죽어갔다.


서하가 멸망한 것은 몽골의 침략도 있지만, 유목민의 전통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서하는 정착민의 제도와 문화를 수용하면서 재부와 안정은 누렸지만, 유목민의 강건함과 용맹은 차츰 잃었다.


멸망의 참화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탕구트족은 옛 거주지로 되돌아왔다. 쓰촨성 서북부에서는 현지 원주민인 티베트인과 강(羌)족으로 분류되지만, 전혀 다른 언어와 문화 체계를 지닌 탕구트족의 후예가 속속 발견되고 있다. 서하왕릉박물관의 한 관계자는 "서하제국이 멸망하면서 흩어진 탕구트족은 '중화민족' 속에 융합됐다"고 말했다. 탕구트족은 중화민족이라는 블랙홀에 삼켜졌지만, 그들이 세운 제국은 역사의 발자취를 깊게 남겨 오늘도 빛나고 있다.


카라호토여, 카라호토여, 전설의 성이여….

칭기즈칸은 성안의 보물을 끝내 찾을 수 없었다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초록색 비늘을 번득이는 커다란 뱀 한 마리,

그것은 저주를 품은 흑장군의 원혼이라네.

카라호토여, 카라호토여, 아! 전설의 성이여….

그 후로 아무도 성 안에서 살 수 없었다네,

그 후로는 아무도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네.

- 카라호토를 노래한 현지 민요 중에서




▲ 쓰촨성 주자이거우(九寨溝)에 거주하는 티베트인의 민족공연. 쓰촨 서북부에서는 탕구트족의 후예로 추정되는 부족이 잇따라 발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