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高原-징기스칸 시스팀 연구
5월27일 오후 3시 북경공항을 출발한 사막과 몽골항공사(MIAT) 여객기는 황무지를 3시간 동안 날아간 뒤 시골역 같은 울란바토르 공항에 도착했다. 이틀 동안 우리 일행을 안내해 주면서 통역을 맡게 될 두 몽골 여성을 만났다. 몽골 외국어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엘덴바트 바예르체체 교수와 駐韓 몽골대사관에 근무했던 아버지를 따라와 서울에서 4년간 생활했다는 S 살룰라양(孃)이었다. {몽고의 하늘이 어디로 갔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초원의 불이 아직 꺼지지 않아 연기 때문에 맑은 하늘이 흐리게 보인다}는 대답이었다. 연기가 안개와 섞임으로 해서 공항에 착륙하지 못하고 가까운 러시아 공항에 내린 비행기도 많았다고 한다.
20代인 두 몽골 여성의 한국말은 발음, 어휘선택, 말의 리듬에서 거의 완벽杉? 일부러 정신을 차려야 한국인이 아니라는 눈치를 챌 정도였다. {한국말은 몽골語와 문법과 어순(語順)이 거의 같기 때문에 단어를 대입만 하면 돼 쉽게, 빨리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뒤 3일 동안 이 두 사람의 통역을 통해서 여러 몽골 관료-학자·유목민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외국인과 이야기한다는 긴장감이 풀어지고 의사전달이 쉬웠다. 정보가 공통된 감정의 흐름을 타고 교류될 때 상호이해가 빨라지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몽골語, 투르크語, 만주語, 한국語, 日本語는 같은 알타이어군(語群)으로 분류된다. 이것은 이 언어를 쓰는 민족들이 한때 인접공간에서 살다가 갈라졌다는 뜻이다. 언어구조가 비슷하다는 것은 사고방식과 감정, 그리고 그 표현방법이 비슷하다는 얘기이다. 기자가 이번 여행에서 접촉해본 몽골人, 카자흐스탄人, 우즈벡人, 터키人의 민족성은 여러 涌【?한국인과 비슷했다.
① 부모와 상사에 대한 존경과 복종심
② 감정적 행동양식
③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것
④ 외래인에 대한 친절
⑤ 솔직성
⑥ 가족중심주의 등이 공통점이리라.
西安에서 만났던 서북대학교(西北大學校) 주위주(周偉洲) 교수(西域史 전문)는 {한민족이 몽골人이라는 데는 찬성할 수 없다. 중국 漢族과의 혼혈이 더 많았을 것이다}라는 견해를 보였었다. 기자는 {우리는 몽골반점이 있지만 漢族들은 그런 게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었다. 몽골에 와 보니 몽골人과 한국人이 같은 종족이란 것은, 복잡한 논리 이전에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본능적 차원의 문제였다. 몽골인과 한국인 사이는 표현의 전류가 통하는데 중국인과는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민족의 고향은?
이날 밤 두 교수를 인터뷰했다. 몽골 국립사범대학의 세계적인 언어학 교수인 D 투물토구 교수와 역사학 교수인 투물 오치르 남질 교수. 두 교수는 몽골인으로서는 드물게 안경을 끼고 있었다. 초원에 사는 몽골인들은 푸른 초원과 하늘, 그리고 멀리 보면서 생활하기 때문에 시력이 4.0까지 나가는 泳汰?있을 정도로 대체로 시력이 초인적이다. 두 교수는 고비사막에서 태어나 학자가 된 뒤에는 벽과 빌딩, 그리고 책만 읽다가 시력이 나빠졌다고 했다.
남질 교수는 {몽골고원에서 퍼져 나간 인종들이 세계를 정복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몽골人은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대륙에 넓게 분포돼 있다}면서 {세 번에 걸쳐 몽골族의 대이동이 있었는데, 한반도에 들어간 몽골인들은 두 번째 이동의 파도를 타고 4천년前까지 대략 이주를 끝낸 것으로 본다}고 했다.
한국인의 선조가 된 부족들은 지금의 바이칼湖 남동쪽에 살고 있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고 했다. 남질, 투물토구 두 교수는 징기스칸의 대제국건설은 몽골부족이 갖고 있었던 우수한 사회·군대조직에 의하여 가능했었다는 주장을 폈다. 몽골군 기마군단은 10人을 기본단위로 하여 백인대장, 천인대장(千人隊長), 만인대장(萬人隊長)식의 피라미드型으로 조직되었다. 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는 징기스칸이라 부를 때의 [칸](王)이 있었다. 몽골 기마군단이 타민족(또는 부족)을 점령하면 적의 우두머리만 처리한 뒤 정복된 군인들을 똑같은 조직원리로 흡수 통합해 버렸다. 몽골 기마군단은 정복지가 넓어질수록 병력 수에서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 눈덩이처럼 구를수록 커지는 몽골 기마군단의 폭발성 때문에 초원지대에서는 대제국(대군단에 의해 지탱되는)이 홀연히 일어났다가 홀연히 사라지곤 했다.
다국적군을 한 덩어리로 묶는 것은 엄격한 군율과 장교-사병의 차별이 없는 동고동락(同苦同樂)의 끈끈한 인간관계 및 약탈에 의한 노획물의 공평한 분배였다. 몽골 기마군단이 이동할 때는 그 가족들이 뒤를 따랐다. 이 가족은 보급부대의 역할을 했으므로 따로 보급부대는 둘 필요가 없었다. 군인들은 항상 가족 속에 있으므로 심리적으로도 안정되는 이점(利点)이 있었다. 軍民일체의 이런 조직은 全주민을 全군인으로 동원할 수 있는, 동원력이 극대화된 조직으로 볼 수 있다.
연대책임에 기초한 군율(軍律)
징기스칸의 세계제국을 가능하게 한 3大요소는 인간, 말, 초원이란 자연적 조건과 이 조건을 효율적으로 결합시킨 그의 지도력이었으리라. 징기스칸의 일대기(一代記)인 원조비사(元朝秘史)를 읽으면 논어(論語)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을 느낄 때가 있다. 징기스칸이 몽골인들에게 강조하는 덕목은 君主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효도, 친구·형제·전우에 대한 의리, 그리고 정직성이다.
<예 : 밤에 보초를 서다가 잠을 잔 두 명의 기병이 붙잡혀 왔는데 그들은 자신의 과오를 솔직히 인정하여 처형되었다. 이를 본 한 페르시아人이 자신들이 처형될 것을 알면서도 왜 자신의 죄를 순순히 인정하였는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자 몽골인 지휘관은 {너희 타지크人들은 그런 경우에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몽골人은 천명의 목숨이 달려 있더라도 거짓말 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고 했다>([라츠네프스키 저(著) 징기스칸])
평등과 충성심
징기스칸은 몽골을 통일한 이후에 [요순]과 [야싸]라는 법령을 발표했다. 여기서 규정된 군율은 연대책임을 지우는 것으로 엄격하다. 10인대(隊)에서 4명 이상 달아나면 나머지 6명도 사형, 공격 또는 퇴각시 앞사람이 떨어뜨린 무기·안장을 줍지 않아도 사형, 10인대에서 포로가 생겼을 때 구해내지 못한 생존자는 사형…. 몽골군대 안에서 장교는 사병과 같은 음식을 먹었다. 장교로서의 명예와 권한은 지녔으되 특권은 없었다고 한다. 부족내에서의 간통은 사형이지만 다른 부족과의 간통은 묵인되었다.
징기스칸은 또 자신을 지키는 친위대원에 대한 처벌권을 독점하여 다른 장군들이 손대지 못하게 했다. 끈끈한 인간관계와 엄격한 군율이 몽골군의 충성심과 전투력의 기반이었다. 몽골유목사회에는 또 노예나 귀족 신분이 없고 이웃만 존재했다고 한다. 남질 교수는 이런 특성은 유목생활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유목생활의 기초단위는 가족이다. 가족내의 윤리도 중요하지만 이웃 가족과의 상호부조는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의 힘을 모으는데 꼭 필요하다. 남질 교수는 [한국과 몽고의 가정에 대한 연구]라는 책을 쓰고 있다. 그는 가정의 구성, 방의 배치, 가정內 교육법이 매우 닮았다고 했다.
세계제국의 건설이 군사력 하나만으로 될 수는 없다. 징기스칸의 군사력을 뒷받침한 정신력은 몽고인이 가지고 있었던 가정과 부족내의 인화·화목·질서·단결에서 나왔던 것이다. 3일간 몽골에서 몽골사람들과 접촉한 결론은 {이 사람들은 바탕이 착하다}는 것이었다. 고마워해야 할 때 고마워하고, 미안해해야 할 때 미안해하며, 수줍어해야 할 때 수줍어하는, 인간의 기본도리에 크게 어긋나지 않으려는 사람들 같았다. 행동이 다소 거칠고 덜 세련돼 보일 때도 있지만 인구의 40%가 아직 유목생활을 하고 있는 나라의 사람들에게 서구식의 에티켓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이런 몽골사람들 때문에 다소 부족하고 불만인 점들이 보여도 덮어주고, 변호해주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는 것이었다.
{중국은 싫다}
몽골공화국의 넓이는 한반도의 8배다. 신강성과 비슷한 1백56만㎢. 인구는 2백20만 명. ㎢당 1.4명 꼴이다. 초원의 불을 끌 만한 人力을 모으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약 40%는 목축업을 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산아제한이 아닌 산아 증가 정책을 쓰고 있는데도 1가구당 평균 가족수는 4명이란 점이다. 흉노제국 시절에도 그랬다고 한다. 1호당 4명이 초원의 섭리에 알맞는 단위인 셈이다. 3백50만 명의 몽골인은 중국의 외몽골 자치구에 살고 있고 50만 명은 러시아에 살고 있다. 남질, 투물토구 두 교수는 러시아보다 중국을 몽골사람들이 더 싫어한다고 했다.
{중국사람들과 제일 많이 싸워 본 몽골人들이 아마도 그들을 제일 잘 알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두렵지 않지만 그들의 정책은 두렵습니다. 중국인이 싫고 무서운 것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투물토구 교수는 그렇게 말하면서 {저는 일본에서 4년간 연구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우리 몽골人과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진 것 같았다}고 했다. 울란바토르에서는 가끔 한국인이 중국인으로 오인 당해 뭇매를 맞는 수가 있어 택시를 타면 먼저 {나는 솔롱고스 사람이다}고 말한다고 한다.
초원을 달리다
유럽 아시아 대륙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유라시아 草原은 만주에서 헝가리까지 연속적으로 뻗어있다. 장애물이 거의 없다. 이 초원의 북쪽은 시베리아의 동토(凍土)가, 남쪽은 다양한 지형(강, 산맥, 밀림)과 文化가 장벽이 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유라시아 草原은 같은 지형, 같은 생활방식(유목), 거기서 생긴 비슷한 문화로 해서 엄청난 거리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의 동질적인 文化를 유지해 왔다. 그런 동질성을 가능하게 했던 매개체가 말이었다. 5월28일 오후 우리는 지프를 타고 울란바토르를 빠져나와 북동쪽, 즉 징기스칸이 태어난 고향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초원은 완만한 곡선이다. 산과 강물, 자작나무와 양·소·말, 그리고 말을 타고 가축을 모는 소년들….
초원의 풍경은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제주도의 중산간 마을풍경과 흡사했다. 동행한 두 몽골 여성에게 물어보았더니 한국의 자연에서 느끼는 분위기는 몽골에서 느끼는 것과 매우 비슷하더라고 했다. 이국에 온 기분이 별로 들지 않는 것은 우리 선조들이 몽골에서 한반도로 들어와 고향 몽골을 연상시키는 어떤 느낌을 발견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반도에서 터키까지 몽골系 인종이 살고 있는 자연의 분위기도 비슷했다. 기질에 맞는 땅을 선택하다가 보니 그렇게 된 것인가. 또 말을 탔다. 초원에서 말을 타는 느낌은 天山산맥에서 타던 것과는 또 달랐다. 달리고 싶었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안장 위에서 선 기분으로 말을 달려보았다. 초원의 그 부드러운 곡면, 서쪽 끝에서 바예르체체 교수가 말을 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혼자서 초원을 질주하는 여자의 모습은 아름답고 장엄했다.
바예르체체 교수는 {말을 타면 왠지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기고 지구 끝까지 달려가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몽골족이 북미, 남미, 인도, 시베리아, 한반도, 일본, 헝가리, 핀란드까지 뻗어나간 것은 초원과 말에서 연유하는 어떤 본능적 역마살(驛馬煞)과 관계가 있으리라. 馬上에 오르면 지구가 좁게 보인다는 이 심리상태가 유목민을 세계사의 매개자, 또는 창조적 파괴자로 만들었다고 기자는 생각한다. 말은 몽골인에게는 제2의 가족이다. 인격적으로 대한다. 바예르체체 교수는
{저녁에 말을 타고 돌아오면 말을 휴식하게 한 뒤 급한 일이 아니면 다시 타지는 않습니다. 웬만한 거리는 걸어갑니다}
라고 말했다. 말에게 근무시간을 보장해 줄 정도란 얘기다. 망아지 시절에 마차용, 승마용, 비육용으로 구별함으로써 탈 말을 끄는 말로 부리는 자존심 상하는 일도 시키지 않는다고 한다. 남질 교수는 몽골말의 우수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2차세계대전 때 몽골말을 소련군에 제공했습니다. 사료를 특별히 준비하지 않아도 초원의 풀을 뜯고 눈을 마시면서 베를린까지 갔습니다. 징기스칸이 사마르칸트쪽으로 원정할 때 20萬 마리의 말을 끌고 갔습니다. 말 두 마리를 옆으로 엮고 그 위에 나무판자를 놓아 무기를 운반하였습니다}
{별일 없습니까}
말을 타고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는 1백∼2백㎞이다. 순간 시속 40㎞도 가능하지만 평균속도는 시속 10∼20㎞ 수준이다. 이 말 덕분에 초원에서 인간의 이동은 빨라졌고, 따라서 정보의 이동도 빨랐다. 요사이 말로 하면 초원은 고대에도 정보화 사회였다. 몽골사람들은 초원에서 처음 만나 인사한 다음 두 번째 질문은 반드시 {별일 없습니까}라고 한다. 이 [별일]은 영어로 번역하면 뉴스인데 몽골어의 신문은 [별일]이란 단어를 제호로 사용하고 있다. 투물토구 교수는 {우리는 옛날부터 [신문 없습니까]라고 인사할 정도로 정보에 민감했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징기스칸의 전법에서 신속한 정보수집과 심리전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도시를 공격하기 전에 스파이를 파견하여 몽골軍의 잔학성을 퍼뜨려 공황상태를 유발하기도 했다. 駐 몽골 한국대사 김정순(金正舜)씨는 {미국·일본이 중심이 된 對몽골원조사업단이 구성돼 올해의 경우 2억1천만 달러를 지원하고 있는데 우리 나라도 40만 달러를 냈다}고 했다.
지난해 한국과의 무역액은 3천8백만 달러로서 한국에서 수출한 것이 약 2천만 달러, 수입이 1천5백만 달러였다. 보따리 장수에 의한 무역은 통계로 잡히지 않아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라고 한다. 울란바토르 시내에서는 스텔라 택시를 자주 보게 된다. 이것은 신라택시라는 한국회사가 가져온 50대(1백20대 목표)에 속한다. 지입제로 하여 사납금을 하루 20달러씩 거두고 있는데 잘 걷히지 않는다고 한다. 삼일무역이란 회사에선 지방버스 노선에 쓸 버스 5대를 가져올 계획이란다. 모세, 시온사라는 2개 봉제 회사도 가동중이다. 金대사가 마련한 현지교민 및 대사관 직원 회식자리에 초대돼 갔더니, 몽골 사람들에 대한 친근한 이야기가 꽃을 피웠다. 몽골사람들은 밤에 바깥에서 이슬을 맞으면서 자도 끄떡없을 정도로 자연과의 친화력이 강하고 비가 오면 옷을 돌돌 말아 꼭 끼고 앉아서 몸으로 옷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7월에 열리는 [나담]이란 축제에 와서 말달리기 대회를 보아야 몽골기마군단의 위용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6천 마리의 말이 뛰는데 초원에 피어오르는 먼지 구름과 지축을 흔드는 말발굽 소리는 정말 가슴을 뛰게 합니다}
문화부차관 인터뷰 : {박정희를 배운다}
몽골 공화국의 다그바돌진 체렌돌 문화부차관은 미국 콜럼비아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는 40代로서 그의 말에서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어떤 열정이 느껴졌다. 한국에는 네 차례 왔었다고 한다.
{지난 겨울에 제주도에 가 보았는데 몽골과 한국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때 1만 명의 몽골병이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제주도 조랑말은 영락없는 몽골말이더군요. 돌하루방도 우리 나라에 있는 것하고 똑같고, 무엇보다도 우리 두 나라 사람들은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가치판단의 감각이 같은 것 같아요} 차관은 {한국이 박정희 대통령의 영도 아래에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발전해간 경험은 우리에게 커다란 자극과 용기를 준다}고 했다. 그는 朴正熙의 발전전략을 길게 설명하면서 {정책에 관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박정희를 연구하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나는 특히 경제개발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력개발을 해간 과정과 朴正熙가 교육에 관심을 가진 점을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그는 도지사 다음 자리에 교육감을 앉힐 정도로 교육자를 존경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박정희의 지도에 의해 한국인들은 오늘과 같은 성격을 갖게 되었다고 봅니다. 제가 서울에 가서 본 한국인들은 부지런하고 가만있지를 못하며, 자기 일에는 성실하고 주인의식이 강하니 나라가 발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자가 {나는 박정희의 전기를 쓰고 있다}고 말하면서 {박정희의 가장 중요한 결정은 수입대체 정책이 아니라 수출입국 정책을 채택하여 처음부터 세계시장에 팔 수 있는 우수한 상품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분위기를 만든 것이다}고 했다. 차관은
{그러니 지금 한국에선 외국상품이 잘 안팔리고 한국제만 팔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국내시장만 겨냥하여 적당히 만들지 않고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다가 보면 제품의 질이 높아지고 이제는 국내 시장을 지키고 있는 것이죠}
라고 말했다. 오는 7월11∼13일 울란바토르에서는 몽골제국 건국 7백90주년 행사가 여러 가지 축제·경기와 함께 대규모로 열린다. 차관은 {이런 행사가 열리게 된 것은 지난 10년간 노력한 결과이다}라고 했다. 몽골이 淸의 지배下로 들어가면서부터 징기스칸에 대한 기념행사는 금지되었다. 1921년 소련 영향下에서 공산국가로 독립한 몽골에서도 징기스칸을 거론하는 것은 민족주의자로 몰리는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었다. 징기스칸 기념일을 만들자는 제안을 한 당 간부는 反혁명분자로 몰려 숙청되었다는 것이다. 1990년 몽골의 자유화 이후 비로소 몽골은 징기스칸을 복권시킬 수 있었다.
1992년에 [元朝秘史] 발간 7백50주년 행사가 치러졌고, 올해엔 대통령의 명령에 의해 건국 7백90주년 행사조직위원회를 구성, 큰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朴正熙는 징기스칸의 후손?}
차관은 {징기스칸은 전설상의 영웅이 아니라 실재했던 영웅이며 아직도 그 영향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역사를 기념하는 것은 과거의 역사가 오늘날 그 형식을 달리하여 되풀이되고 있는 점을 찾아내 교훈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기자가 덧붙였다.
{박정희와 징기스칸은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몽골 민족이 가진 특성과 잠재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하여 큰 나라를 만드는 데 성공한 점에 있어서는 몽골인 출신의 두 지도자는 비슷하고 두 사람을 비교연구하면 새로운 것을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차관은 {우스개로 받아주십시오}라면서 말했다.
{1206넌 징기스칸이 몽골제국의 창건을 선언한 직후 주변 국가에 사신을 보냈습니다. 고려에서는 징기스칸 제국을 승인한다는 뜻을 담아 공주를 보냈습니다. [흘랑]이라는 이 여인이 징기스칸의 네 왕비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박정희가 그 자손인지 누가 압니까}
지난해 몽골을 찾은 한국인은 약 6천 명. 그 중 1천 명은 공식 방문, 나머지는 주로 관광객들이었다. 이 숫자는 몽골과 고려가 가까웠을 때의 年교류 인원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몽골에선 한국을 [솔롱고스]라고 부른다. 투물토구 교수는 [무지개가 뜨는 동쪽 나라]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솔롱고스
몽골국립대학 역사학과 과장 후켄바타르 교수는 {[솔롱고스]란 말의 뿌리를 찾아올라 가면 [새벽의 밝은 빛], 즉 朝鮮이란 말뜻과 만나게 된다]면서 흥미 있는 주장을 했다.
{고구려와 동쪽 몽골 지역은 접경하고 있었습니다. 몽골족과 고구려 사람들이 서로 결혼을 하여 [미르키트 송골로스] 부족이 생긴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종족은 징기스칸의 장남 주치의 영토 안에서 살고 있었는데 서쪽으로 원정을 갈 때 동원돼 볼가江 남쪽의 초원에 정착했습니다}
후켄바타르 교수는 [몽골과 한국의 관계는 서기 13∼15세기 때가 가장 좋았습니다. 명나라가 건국된 이후 끊어졌다가 1990년 이후 다시 연결되니 참 좋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최근 두 나라 관계가 정상화 된 이후 역사적으로 두 나라의 교류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아졌으므로 새로운 발견이 많이 나올 것이다}라고 했다. 그도 {인종적으로 몽골과 가장 가까운 종족은 거란·여진도 아닌 한국인이라고 본다}고 했다. 전날 밤에 만났던 투물토구 교수는 {한글을 만들 때 몽골문자 드루찐의 모양을 참고로 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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