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효 근본 詩契 조직 망국의 恨 달래
-하늘에게 명구(名區)를 빌려 건물을 세웠으니/ 붉은 언덕 푸른벽이 저절로 성곽(城郭) 되었네/ 처마를 에워싼 구름은 하늘에 서려있는 기세요/ 창문으로 들어온 파도는 바다물 끊는 소리로세/ 수렁에 가득찬 금서(琴書)는 후손을 가르칠 계산이고/ 하공(河公)이 세운 비각(碑閣)이 서로 마주 대(對)하였으니/ 용(龍)의 기세 날아오를 듯 상서로운 해 솟아나네 <호산(壺山) 박재식의 詩‘운흥정’>
▲사진(1)=운흥정은 1926년 구례군 산동면 지역 선비들에 의해 건립된 정자이다. 선비들은 이 정자를 중심으로 시계(詩契)를 조직, 시회(詩會)를 열어 망국의 설움을 달랬다.
▲사진(2)=시랑산 자락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로 형성된 용소(龍沼). 세종때의 선비 허연이 꿈 속에서 용(龍)을 보았다는 이 용소는 신비스러움을 간직한 채 간간히 찾는 길손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
충효 근본 詩契 조직 망국의 恨 달래
-하늘에게 명구(名區)를 빌려 건물을 세웠으니/ 붉은 언덕 푸른벽이 저절로 성곽(城郭) 되었네/ 처마를 에워싼 구름은 하늘에 서려있는 기세요/ 창문으로 들어온 파도는 바다물 끊는 소리로세/ 수렁에 가득찬 금서(琴書)는 후손을 가르칠 계산이고/ 하공(河公)이 세운 비각(碑閣)이 서로 마주 대(對)하였으니/ 용(龍)의 기세 날아오를 듯 상서로운 해 솟아나네 <호산(壺山) 박재식의 詩‘운흥정’>
어지럽게 돌아가는 세상사를 뒤로하고 시랑산 기슭에서 흘러내린 물소리와 솔향 그윽한 봄바람에 취해 있는 구례군 산동면 시상리에 자리한 운흥정(雲興亭).
운흥정은 1926년 산동면 유지들이 시계(詩契)를 조직해 시회(詩會)를 여는 장소로 지어진 정자로, 계곡의 물소리와 철따라 피고지는 꽃들이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키는 경관을 갖고 있어 구례 대표적인 정자로 꼽히고 있다.
다른 정자에 비해 다소 건립 시기는 늦긴 하지만 나름대로 많은 역사를 지니고 있고, 당시 지역의 선비들이 모여 시문을 즐겼던 곳으로 정내(亭內)에는 기문(記文)과 시문(詩文) 등 85개의 현판이 게액되어 있으며, 정자 밑 석벽에는 운흥사(雲興社)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특히 이 정자는 시랑산 기슭에서 사시사철 흘러내리는 계곡물이 솔숲과 어우러져 뛰어난 풍광을 연출하고 있어, 남원을 비롯 인근 곡성 지역 선비들의 발길이 이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운흥정 맞은 편에는 세종때 전라도 감사를 지냈던 하 연이 꿈에 용을 보았다는 일화가 새겨진 ‘하연비’가 푸르른 이끼 속에 외롭게 서 있고, 정자의 주변으로는 용소(龍沼), 그리고 실제로 용(龍)을 보았다는 용견지(龍見止)가 전해오고 있어 그 신비감을 더해주고 있다.
이 정자 왼편에 걸린 1930년 이도복이 쓴‘운흥정기‘(雲興亭記)가 눈길을 끈다. 여기엔 정자의 이름을‘운흥정’이라고 붙여진 내력을 소상히 적고 있다.
정기(亭記)에 따르면 산동면 출신의 효심이 지극했던 박해창이 영각선반(瀛閣仙班:홍문관)의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내려와 가정을 다스리며 효도를 근본으로 삼고 여생을 보냈다.
이때 박공(朴公)은 시랑산에 모셔진 아버지의 묘를 관리하면서 산동지역 선비들과 교류, 시문을 읊으며 망국의 한과 우국충절을 달랬다.
옛부터‘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했던가. 하지만 의인(義人)의 주변에는 꼭 의인들이 몰리는 법. 박 공의 뜻에 감화한 지역 선비들은 시계(詩契)를 결성, 시회(詩會)를 통해 사람살이의 기본이 되는 충효와 암흑기에 처해 있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울분을 운율로 담아냈다.
-정자아래 맑은 시냇물 비단을 가로놓은 듯/ 명산은 성곽을 둘렀고 수목도 연이었네/ 바람불고 뇌성하는 새벽에 어용(魚龍)꿈이 차가운데/ 가을밤 별과 달 아래 맹세하는 학의 소리란다/ 속세 밖에 구슬같은 참다운 지경있으니/ 인간들의 영화와 치욕 이미 잊었어/ 하옹(河翁)의 옛 물가에 영험이 오히려 남아있으니/ 얼키고 설킨 구름속에 상서빛 생겨나누나 <1925년 박해창 지음>
석양을 받아 붉게타는 정자 위로 새하얀 매화 꽃잎이 사뿐히 내려앉고 있다. 간간히 불어오는 솔바람 소리에 용소(龍沼)가 잔잔히 일렁인다.
마치 500여년전 하옹(河翁)이 꿈에서 보았다는 용(龍)이라도 나타나려는 것일까.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사진·그림=박주하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