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45)=구례 방호정

화이트보스 2009. 1. 14. 11:39




일제 강점기 구례 정신문화 발원

돌을 깎아 정자를 세운 짧은 산자락 서쪽에/ 사계절 풍경이 서로서로 가지런하지 않아/ 발을 거두고 산봉우리 달을 온전히 차지했고/ 베개에 누워 한가로이 두어 곡조/ 시냇물 소리를 들었네/ 노소(老少)가 자리를 같이하니 정의가 합당하고/ 먼곳 가까운곳 선비 가득앉아 바라보니 눈 정신 희미해/ 바라노니 손질하기를 끝까지 이처럼 한다면/ 뒷날 명성 역시나 낮아질 일 없을거야. <지재(智齋) 홍성옥 읊음>

봄날 수요일 오후, 산수유가 지천으로 흐드러진 구례군 산동면 좌사리 상관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방호정(方壺亭)을 찾았다.

동구밖에 들어서자 절벽 끝에 위태롭게 걸려 있는 정자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구례지역 정자 가운데 가장 풍광이 빼어나기로 소문난 방호정이 바로 이 곳이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얹어져 있는 방호정은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듯한 착각까지 안겨 주며 한창 물 오른 산수유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온통 노랗게 물들어 버린 세상 귀둥이에 꽃바람 맞으며 외롭게 서 있는 방호정, 이 정자는 1930년 지역 유지들의 갹출로 시회소(詩會所) 장소로 활용키 위해 지어졌다.

일제 강점기였던 당시 상황에서 방호정은 인근 운흥정(雲興亭)과 더불어 지역 선비들이 모여 망국의 한과 우국충절을 달랬던 곳으로, 1920~30년대 구례 지방의 정신문화를 이끌었던 터라 구례가 배출한 웬만한 인물들은 모두 이곳을 거쳐갔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방호정은 현재 지방문화재 자료 제32호로 지정돼 있으며, 정내(亭內)에는 40여개의 현판이 걸려있어 지역 시단(詩壇)의 흐름과 구례지역의 정신사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방호정은 여느 정자와는 달리 지역 여론과 사회적 담론을 담아내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특히 선비들은 이 정자에서 지식인으로서 참지못할 나라잃은 울분을 삭히며 망국의 한을 시문으로 풀어냈으며 홍익인간에 근본을 둔‘인간존중사상’을 뿌리 깊게 묻었다.

누가 세월을 흐르는 물과 같다고 했던가. 이 정자의 정신을 지탱하고 있는 상량문은 이미 퇴색돼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만큼 인고의 세월과 온갖 풍상을 겪었음이리라.

상량문 밑으로 구례지역의 문장가였던 학천(鶴川) 홍홍조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눈에 들어온다.

-옥녀봉 동쪽 만복대 서쪽/ 그 가운데 풍경이 바라보는 눈앞에 가지런해/ 붉은 언덕 푸른 벽에 달아 넝쿨 천갈래요/ 가늘한 버들 새 부들에 돌하나 시내였네/ 소나무 난간에 마루 높았으니 속세가 멀어지고/ 시정(詩亭)이 가물가물 꿈속처럼 희미하다/ 이제에 이르러 금란계(金蘭契)를 맺었으니/ 영구한 명성 맹세코 낮아지지 않을거야.-

서정성이 물씬 묻어나면서도 시우(詩友), 즉 사람에 대한 애정을 담고 있는 한 편의 시(詩)이다.

어쩌면, 암울한 시대였음으로 작품 속에 침울함과 억누름이 내재돼 있을 법 하지만 그러한 망국의 울분을 민족언어로 빚어낸 선비들의 가슴시린 정신이 새삼 빛나기만 하다.

방호산 계곡 얼음장 밑으로 민족의 슬픔처럼 숨죽여 흘렀을 물줄기는 ‘자유의 빛’을 찾은 오늘도 변함없이 세상 속으로 흐르고 있다.

석양에 밀려온 바람이 순례자 머리 위에 벚꽃잎을 떨궜다.

마치 암울한 민족의 앞날을 걱정했던 선비들의 긴 한숨처럼 꽃잎은 그렇게 소리없이 쌓여만 갔다.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