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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장이라 해봤자 카메라와 필름 몇 통이 고작이지만, 잠시라도 회색빛 도시를 탈출(?)한다는 것에 대한 설레임으로 순례자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사진(1)=조선 중기 곡성지역 선비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함허정, 이 정자 아래로 수정처럼 맑은 섬진강이 흐르고 수목이 울창해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사진(2)=곡성군 입면 제월리에 위치한 ‘군지촌정사’는 당시 곡성지역 영재교육의 메카로 활용돼 훗날 지역의 정신문화 본산으로 자리매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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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장이라 해봤자 카메라와 필름 몇 통이 고작이지만, 잠시라도 회색빛 도시를 탈출(?)한다는 것에 대한 설레임으로 순례자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광주를 빠져나와 부산 방향으로 한 시간 남짓 달렸을까. 곡성 톨게이트를 지나 입면 제월리를 향하는 섬진강변에는 유채꽃이 정신없이 흐드러져 있었다.
수정처럼 맑은 섬진강을 향해 돌출한 구릉의 절벽 끝에 정자 한 채가 노란 유채꽃과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유화를 연상케 했다.
마침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정자 밑으로 흑두루미 한 마리가 백사장에 외발로 서서 옛 운치를 그대로 살려주기에 충분했다.
함허정(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60호)은 조선 중종 38년(1543) 청송인 심광정(靑松人 沈光亭)이 지역 유림들과 시문(詩文)을 논하며 풍류를 즐기기 위해 건립됐다.
그후 증손인 청안현감 심민각(沈民覺)이 쇠락한 정자를 옛터의 아래에 옮겨 새롭게 손질했고, 다시 5대손인 심세익(沈世益)이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정자는‘함허정’이란 이름 외에도‘호연정’이란 별칭도 갖고 있다. 이 이름은 심세익이 세립, 세일 두 아우와 우애가 돈독해 사람들이‘호연’이라 불러진데서 비롯된 것이다.
함허정 주변에는 역사의 흔적이 여기저기 배어있다. 정자를 오르는 길목엔 지금도 연자방아가 옛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으며, 아름드리한 상수리나무며 이끼 낀 하마석(下馬石), 그리고 ‘군지촌정사(君池村精舍)’가 이 마을의 유구한 역사를 소리없이 대변해 주고 있다.
정자에서 100m 떨어진 곳에 있는‘군지촌정사’는 심광정이 후학 양성을 위해 건립한 가옥으로 당시 곡성지역 영재들의 교육기관으로써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군지촌’이란 이름은 당시의 마을 이름에서 따 온 것이고,‘정사(精舍)’란 일반적으로 주택을 교육용으로 이용한 개인적인 서재나 사숙(私熟)을 의미한다.
이 가옥은 조선 중종 38년(1543)에 건립된 건물로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된 조선중기 사대부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을 지니고 있다.
특히 군지촌정사는 이웃 함허정과 함께 지방 유림들의 학문과 풍류가 어우러졌던 곳으로 곡성지역 정신문화의 발원지가 됐다.
함허정, 당시 옥과 현감이 부임하면 반드시 봄철 향음례를 이곳에서 베풀며 지역 유림들과의 교분을 쌓았다하니 당대 문사들의 낭랑한 목소리가 솔바람을 타고 들려오는듯 하다.
정내(亭內)에 걸린 시 한 귀절이 눈에 들어온다.
-순자강 물소리에 온갖 시름 씻고서/ 둘이서 술마시며 부질없이 머물렀네/ 굽이친 강줄기 창룡(蒼龍)이 누운듯/ 아득한 큰 들판에 백조(白鳥)가 떠있구나/ 이내몸 광음(光陰)같은/ 과객(過客)이건만/ 그대는 정자아래 빈 배만 띄울손가/ 문장(文章)과 선이(仙吏)를 나먼저 얻어/ 흥겨운 풍유로 몇 해를 지냈는가. <판서 민경규 읊음>
서정성이 물씬 묻어나는 시 한 편을 음미하며 돌계단을 내려밟았다.
함허정을 돌아나오는 길가엔 무더기로 돋아난 쑥이 진한 향을 발하며 순례자의 코 끝을 지긋이 자극했다.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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