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의 선비 심계 심채진 선생(1738~1808)을 아는가.
학문이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재야에 머무르며 지역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던 선비가 바로 심계 선생이다.
▲사진(1)= 심계 선생의 가르침은 훗날 곡성 정신을 살찌우게 한 원동력이 됐으며, 그 정신은 오늘날 호남의 정신으로까지 맥이 흐르고 있다.
▲사진(2)= 곡성군 겸면 칠봉리 언덕배기에 자리하고 있는 대환정은 심계 심채진 선생(1738~1808)의 올곧은 선비정신이 오롯하게 스며있다
곡성의 선비 심계 심채진 선생(1738~1808)을 아는가.
학문이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재야에 머무르며 지역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던 선비가 바로 심계 선생이다.
햇살이 따갑도록 내리쬐던 봄의 끝자락, 그의 체취가 물씬 묻어나 있는 곡성군 겸면 칠봉리에 자리한 대환정(大還亭)을 찾았다.
이끼 낀 돌담을 끼고 돌계단을 올랐다. 대환정은 다른 정자와는 달리 돌담으로 둘러져 있어 토속적 냄새가 풍겼고, 담장 안에는 연분홍빛 작약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이 정자의 건립연대는 정확히는 알수 없으나 심계 선생의 활동 시기로 보아 1760년께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심계 선생에 대한 많은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그의 후학들이 스승의 인품를 그려놓은 시문이 몇 편 전해지고 있어 글로써마나 그의 인품을 어느정도 감지해 볼 수 있다.
그는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었고, 자식들에게는 엄한 아버지였다.
심계 선생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때 묘지를 지키며 엎드려 3년상(三年喪)을 치렀다 하니, 그의 효성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대환정에는 그를 기리는 후학들의 현판들이 여러개 걸려있다. 이 가운데 판서를 지낸 김정균(金鼎均)의 시문이 눈에 들어온다.
-칠봉산(七峯山) 아래 어진 분 사시니/ 그 늙은이 정자 짓고 아들 글 가르친다/ 집을 두른 청산(靑山)은 어르신네 취향(趣向)이요/ 마룻가에 흐른 물은 앉아 고기잡을레라/ 사면(四面)의 솔바람 가슴 속 시원하고/ 삼경(三更)에 뜨는 달은 세상(世上)근심 멀게한다/ 형이며 아우 지극한 효성/ 여가(餘暇)에 문장(文章)이요 육예(六藝)도 즐긴다-
심계 선생의 훈훈한 인품과 선비정신은 제자의 글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옛말에‘효자 집안에서 효자가 난다’고 했던가.
심계는 이 정자에서 엄격한 계율 속에서 다섯아들을 길러냈다. 어지러운 조정과 정권 쟁탈을 위해 중상과 모략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선비가 가져야 할 도리를 가르쳤던 것이다.
다섯 아들 가운데 그의 가르침들의 뼈저리게 받아들인 사람은 둘째 아들로 전해진다.
훗날 진사를 지내기도 했던 둘째 아들의 시문이 정자에 걸려 순례자를 겸허하게 맞았다.
-늙은이 한평생 살곳이 없어/ 10년을 주희(朱熹)의 글만 읽었네/ 돌아온 산아래 삼간(三間)집 있어/ 한가로이 시내에 앉아 고기떼 굽어본다/ 송죽(松竹)은 뜰가득 시흥(詩興)을 돋우고/ 신선(神仙)과 교계(交契)있어 세속(世俗)의 정(情) 멀었구나/ 긴긴 세월 인상사(人生事) 바둑 한 판인가/ 생애(生涯)를 즐기며 태평하게 늙고 지고-
다섯 자식과 지역 청년들을 불러모아 시문과 선비의 올곧은 정신을 교육하며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던 심계 선생.
특히 그의 일화 한토막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저미게 하고있다.
당시 심계는 병자호란을 한탄하면서 청(靑)의 년호(年號)를 완강히 거부하고 명(明)나라 통기(統紀)를 썼으며, 국기(國忌)에는 연회에도 불참했다는 것.
사람들은 대나무를 가르켜 ‘절개’또는 ‘올곧은 선비의 기개’로 일컬으고 있다.
그렇다, 심계 선생은 사시사철 푸르른 대나무처럼 곡성 정신을 지탱해왔는지도 모른다.
먼지가 뿌옇게 날리는 오늘, 그의 체취가 몸서리치게 그리워지는 이유는 뭘까.
정자 계단을 내려오는 순례자의 발걸음은 왠지 무겁기만 했다. 그림·사진/ 박주하 화백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