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화정
보성‘득량(得粮)’…. 이름만 들어도 뭔가 강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지않은가.
그러니까, ‘득량’이란 이름은 이렇게 연유됐다. 1592년 임란 당시 비봉리 선소 마을 앞 섬(지금의 득량도)에서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 대치 하고 있었다. 이때 아군의 식량이 떨어져 비봉리 선소에서 식량을 조달해 왜군을 퇴치 했다하여 얻을‘得’양식‘粮’자를 인용, 이것이 오늘날‘득량’으로 명명된 것이다.
▲사진(1)=보성출신의 큰 선비 이재 이진만(怡齋 李鎭晩)의 민족정신이 오롯하게 배어있는 열화정. 1845년(헌종 11)에 지어진 이 정자는 그동안 수많은 후학들이 배출돼 오늘날 보성정신의 큰줄기를 형성한 원동력이 됐다.
▲사진(2)=득량면 오봉리 강골마을 뒷편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 정자는 지금은 잡초만 무성하게 우거져 간간히 찾는 순례자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열화정
보성‘득량(得粮)’…. 이름만 들어도 뭔가 강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지않은가.
그러니까, ‘득량’이란 이름은 이렇게 연유됐다. 1592년 임란 당시 비봉리 선소 마을 앞 섬(지금의 득량도)에서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 대치 하고 있었다. 이때 아군의 식량이 떨어져 비봉리 선소에서 식량을 조달해 왜군을 퇴치 했다하여 얻을‘得’양식‘粮’자를 인용, 이것이 오늘날‘득량’으로 명명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곳 득량은 물질과 정신이 풍요롭게 살아꿈틀거리고 있음을 체감할 수 있다.
득량 출신의 대표적인 선비로는 조선말 이재 이진만 선생(怡齋 李鎭晩)을 꼽을 수 있다, 그의 체취를 더듬기 위해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를 찾은 수요일 오후는 초여름의 녹음과 함께 선비의 기품처럼 푸르기만 했다.
키낮은 석축을 돌아 토담을 끼고 얼마나 걸었을까. 이재 선생의 정신이 오롯하게 배어있는 열화정(悅話亭)이 대숲 사이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조그만 접시형 골짜기에 자태가 아름다운 오봉산을 바라보며 남향으로 앉혀진 열화정, 마치 누더기옷을 걸쳐입은 청빈낙도의 선비처럼 겉모습은 보잘것 없었지만, 일섭문(日涉門)을 들어서는 순간 세상사에 절여진 순례자의 마음을 차분하게 끌어 내렸다.
지난 84년 민속자료 제162호로 지정돼 현재 광주이씨(光州李氏)가 관리해 오고 있는 이 정자의 주인은 조선 반골의 선비 이재 이진만이다.
강골마을 뒤 깊숙히 묻혀있는 열화정, 정자 주변에는 이재 선생의 기개를 닮은 곧게 뻗은 대나무가 빽빽히 에워싸고 있고, 그 옆으로 조그만 실개울이 흐르고 있다.
한때 많은 선비들이 이곳을 드나들며 마른 목을 축였을 옹달샘이 바닥을 드러내 보이고 있어 마치 요즘 세상인심을 반영해주고 있는 듯하다.
1845년(헌종 11)에 건립된 열화정은 여느 정자처럼 여흥이나 베푸는 장소가 아니었다. 어지러운 국사(國事)와 탐관오리들의 횡포 등으로 나라가 흔들리고 있을무렵, 이재 선생은 지역 동량들을 모아 장차 나라의 기둥을 길러냈던 정신수양의 도장이었다.
특히 그의 손자 이방회(李訪會)가 보성에 유배돼 이곳에 머물면서 당대의 석학 이건창(李建昌) 등과 함께 학문을 논했던 곳으로, 오늘날 보성정신의 발원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뿐이겠는가. 한말 의병을 일으켜 일심(一心)으로 구국(救國)의 정신을 실천했던 이관회(李貫會), 이양래(李陽來) 등을 배출해낸 곳이기도해 더욱 의미가 새롭기만 하다.
그래서일까, 정자 주변에는 하늘을 찌를듯한 대나무들이 울창하다. 간간히 볼을 간지럽히는 실바람에 대잎이 부딪혀 사각이고 있다. 마치 정신을 잃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무언의 일침을 가하는 이재 선생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처럼…. 글/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그림·사진/ 박주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