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유학(儒學)의 거두인 분암(憤菴) 안 훈 선생(安 壎·1881~1958). 그의 올곧은 민족정신이 서려있는 곡성 완계정사(浣溪精舍)를 찾았다.
곡성군 오곡면 소재지에서 금계천을 따라가다 덕산마을에 다다르기 직전 왼쪽 천덕산 기슭으로 난 오솔길로 접어돌면 산자락 계곡 속에 완계정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천여평은 족히 됨직한 대지 한가운데에는 큰 은행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 있다.
이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완계정사, 산앙사(山仰祠), 그리고 전사청(관리사)이 한 동씩 자리잡고 있다.
▲사진설명(1)=완계정사 옆에 자리한 옹달샘 ‘우천(愚泉)’. 이 샘은 분암 선생의 정신을 닮아 아무리 극심한 한해에도 마르지 않고 흐른다해 손자인 안형식씨가 ‘어리석은 샘’이라는 뜻으로 이름 붙였다.
▲사진설명(2)=1906년 지역의 인재양성을 위해 건립된 완계정사. 이 정사는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절 분암 선생이 수 천여 명의 제자들을 모아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던 독립운동의 산실이다
근대유학(儒學)의 거두인 분암(憤菴) 안 훈 선생(安 壎·1881~1958). 그의 올곧은 민족정신이 서려있는 곡성 완계정사(浣溪精舍)를 찾았다.
곡성군 오곡면 소재지에서 금계천을 따라가다 덕산마을에 다다르기 직전 왼쪽 천덕산 기슭으로 난 오솔길로 접어돌면 산자락 계곡 속에 완계정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천여평은 족히 됨직한 대지 한가운데에는 큰 은행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 있다.
이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완계정사, 산앙사(山仰祠), 그리고 전사청(관리사)이 한 동씩 자리잡고 있다.
완계정사의 주인은 분암(憤菴).
그는 일찍이 경남 거창 땅으로 건너가 당시 영남의 거유(巨儒)로 명성이 자자했던 면우(冕宇) 곽종석(郭鍾錫) 선생의 문하에 들어 하경진· 김 황 등과 함께 3대 제자로 학문에 정진했다.
“조예(造詣)가 충분해 고인(古人)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스승의 판단에 따라 분암이 스승의 곁을 떠나 온 것은 그의 나이 27세가 되던 해.
정든 학당을 떠나 남원 운봉제(峙)를 넘어 올 적에 그의 명성을 익히 들은 곡성의 유지와 유력인사들이 운봉 고개마루까지 찾아와 말(馬)을 대기 하고있다 모셔왔다는 일화는 지금도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분암은 일본을 비롯한 서구의 열강들이 조선에 세력기반을 형성하고자 혈안이 되고 있던 무렵인 1881년에 태어났다.
그가 학문을 익힌 후 뜻을 두어 결심한 것은, 일제 아래서 벼슬에 올라 안위를 지향하며 일생을 살아가기 보다는 고향에서 인재를 길러 나라의 힘을 기르는 것이었다.
이러한 각오는 그의 아호(雅號)인 분암(墳菴)에서 느낄 수 있다.
1906년 지리산 문필봉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마을 옆 계곡인 완계(浣溪) 곁에 집을 짓고 당초에 ‘일초정’이라 이름 하였다.
이 지역을 풍수지리적 형국론으로 본다면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이라는 것. 즉 목 마른 말이 물줄기를 찾아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일제에게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암울한 식민지 시대의 청년 학도들이 학문에의 목마름으로 이 완계정사를 찾을까.
이곳을 찾은 청년들은 분암의 가르침을 받아 사악(邪惡)에 빠지지 않고 정도(正道)만을 걸으며 그 배움을 풀어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세우는데 힘을 보탰다.
그러나 이때 분암은 일제에 의해 숱한 방해 공작과 횡포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서당에서 공부하는 학동들만 골라 군대보내기, 책 빼앗아가기, 소작농사 끊기, 서당 옆 소나무 베어가기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분암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일제의 단발령, 창씨개명 등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면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고, 1941년 의병장 이석용의 추모비를 세우려다 일경에 검거되어 임실형무소에서 110일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리고 해방을 전후한 시기까지 곡성·구례 뿐만이 아니라 남원, 임실, 순창, 거창 등 영호남에서 모여든 수천명의 제자들을 양성하여 호남 유학의 한 줄기를 형성해왔다.
특히 분암 선생은 1919년 프랑스 파리 만국회의에 조선독립을 호소하는 파리 장서를 보낸 137인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분암집 26권이 있으며 선생의 고귀한 독립정신과 얼을 계승하고자 국가보훈처에서 이곳을 독립운동사적지로 지정했다.
이 정사의 뒷켠엔 ‘어리석은 샘’이란 뜻의‘우천(愚泉)’이라 이름된 옹달샘이 있다.
‘우천’이란 이름은 ‘아무리 극심한 한해에도 마르지 않고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하여 손자인 안형식씨(현재 곡성군 오곡면장)가 조부(祖父)의 지고지순한 민족정신을 기리기 위해 훗날 붙여놓았다.
가는곳 마다 먼지만 자욱히 날리는 요즘 세상…, 왠일인지, 분암 선생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그리워진다.
돌아오는 길‘우천’에서 떠 마신 물 한 모금이 곡성을 빠져나올때까지 내내 혀끝에 감돌았다. 글/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그림·사진/ 박주하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