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52)=보성 천인정

화이트보스 2009. 1. 14. 11:52

세상은 온통 눈(雪)빛이었다. 지천으로 흐드러진 삐비꽃이 비봉산을 넘는 석양에 반사돼 수요일 오후를 하얗게 채색하고 있었다.

만개한 삐비꽃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천인정을 오르는 길은 마치 남농 허 건 화백의‘노송도(老松圖)’를 연상케 하는 10여 그루의 늙은 소나무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지 채 꺾여 정겨움을 더했다.

보성군 복내면 봉천리 당촌 마을 비봉산(飛鳳) 기슭에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는 천인정, 이 정자는 정면 3칸의 팔작지붕 골기와 건물로 대칭형을 이루고 있으며 ‘천인정’이라는 현판과 함께 26개의 기문(記文)과 시문(詩文)이 걸려있다.

▲사진(1)=보성군 복내면 봉천리 비봉산 기슭에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는 천인정. 1788년(정조 12)에 건립된 이 정자는 한·일합방 이후 일제가 이 자리에 일본 신사를 지으려 했으나 지역민들의 강력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진(2)=천인정과 함께 나란히 당촌 마을을 지키고 있는 별신당. 이 당집 안에는 남근 모형의 다섯개의 돌이 한지로 싸여있어 민족 정신의 면면을 살필 수 있다.



‘천인정기’에 따르면 이 정자는 1788년(정조 12)에 당촌마을의 광주 이씨(廣州 李氏)가문에서 지역의 후진 교육을 위해 강학소 목적으로 건립했다. 처음에는 람덕정(覽德亭)이라 이름했다가 1841년(헌종 7년)에 천인정이라 다시 이름을 지어불렀다.

‘천인(千人+刃)’이란 ‘봉비천인 기불탁속(鳳飛千人+刃 飢不啄粟)’의 문귀에서 따 온 것으로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표현한 것이며, 이 지방 유림들이 모여 우국충절하며 시문을 즐기는 장소로 활용돼 오늘날 보성 정신문화의 본산으로 자리매김 됐다.

그런데 이 정자는 다른 정자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함을 발견할 수 있다.

건립시기는 1788년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의 상량문에는‘開國 534年 乙丑 4月10日…’이라는 명문이 뚜렷이 대들보에 적혀있다.

그렇다면, 천인정의 건립 연대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 의문은 정자의 내력과 주변의 풍수지리를 찬찬히 뜯어보면 금방 해법은 풀린다.

천인정이 자리하고 있는 이곳은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으로 보성 지역의 몇 안되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한·일 합방 이후 일제가 보성의 명당 중의 명당인 복내면 당촌마을(현재 천인정이 있는 곳)에 일본 신사를 지으려들었으나 주민들의 강력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특히 이 정자는 고종황제가 갑오경장 후 조선의 자주성을 강조하기 위해 4년간 썼던 연호인‘개국 503~506년’을 추산, 당시의 일본 연호인 명치(明治)연기를 쓰지 않고 개국 연호를 썼던 자주성을 보였다.

그런 연유일까.

보성지역 선비들은 이 정자를 일컬어‘반골의 정자’,‘민족 자존의 정자’로 불리우며 생명처럼 중히 여겨오고 있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또 하나 더 있다.

천인정에서 불과 3m 떨어진 곳엔‘별신당(別神堂)'이라는 작은 당집이 있다. 이 당집 대들보의 상량문 역시‘開國 506年 丁酉 正月 24日, 化主 金遠天, 木手 全弘伊’라고 쓰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1897년에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당집 안은 나무판재 시렁이 있고 30~57cm 크기의 돌 5개를 한지로 끝부분을 가리고 왼새끼로 묶어 올려놓았다.

천인정, 그리고 별신당…. 일제 치하에서도 민족정신을 굽히지 않고 ‘개국 연호’를 사용해 민족 자존을 지켰던 보성지역 사림들의 정신이 오롯하게 배어있다.

그림·사진/박주하 화백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