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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육모정
함평읍 저잣거리로 나가 길가던이 아무나 멈춰세워 ‘함평 이 진사댁이 어디냐’고 물어보라. 더불어 이 진사댁 뜰안에 있었던‘육모정’까지….
‘이 진사댁과 육모정, 그리고 백범 김 구’는 뗄래야 뗄 수 없음을 쉽게 알수 있으리라.
▲사진(1)=1898년 3월19일 백범 김 구 선생이 인천감옥에서 탈옥해 함평으로 피신, 진사를 지냈던 이동범의 집에서 15일 동안을 머물며 지역 선비들과 교유했다.
▲사진(2)=육모정은 1924년 도로공사로 인해 헐리고 말았지만, 정자 터는 고스란히 남아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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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육모정
함평읍 함평리에 자리하고 있는 이 진사댁은 지금도 옛 영화를 그대로 간직한 채 솟을대문이며 위엄있게 얹어진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낯선 이방인을 맞고 있다.
‘인걸은 간데없고 잡초만 무성하다’라 했던가. 문득 고시조 한 귀절이 뇌리를 강하게 스쳐 지나간다.
옛 진사집 답게 뜰에는 각종 유실수와 꽃나무들이 담장을 넘쳤고, 연못이 있었던 곳으로 짐작되는 토방 밑에 육각형의 석축이‘육모정’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이 육모정은 다른 정자와는 달리 대한임시정부 당시 주석을 지냈던 백범 김구 선생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정자는 1880년 초 무과에 급제한 관료 이계송(李啓松·1841~1884)이 지붕에 띠를 엮어 건립, 지역의 선비들과 어울려 시문을 논했던 사랑방 역할을 했던 곳이다.
훗날 이 육모정은 이계송의 아들 이동범에게 넘어가면서 백범 김 구 선생과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된다.
1898년 3월19일 인천감옥에서 탈옥한 백범 김 구 선생은 호남으로 잠행, 남원의 김형진(金亨鎭)집에서 며칠 머물다가 이곳으로 와 이동범(李東範·1869~1940)과 교분을 나누며 보름동안 육모정에 숨어 지냈다.
육모정 밑에는 난리를 대비해 설치해 둔 비밀 토굴이 있었으며, 현재 헐리고 없는 7칸 본채에는 몇이 숨어 지낼 수 있는 다락방이 마련돼 있었다.
백범 선생이 숨어 지냈던 육모정은 1925년~1926년에 현재 국도 23호선(당시 2등 도로)가 개설되면서 도로에 편입되고 말아 아쉬움을 주고 있다.
이 정자의 주인 이동범은 도로가 개설되기 1년 전인 1924년 도로에 편입되는 육모정을 철거 매각했으나, 그의 아들 이재혁(李載赫)이 옆에 육모정 연못의 돌을 옮겨 새로이 연못을 파고 그 안에 육모정과 똑같은 형태로 기와를 얹어‘연정’을 지었다.
육모정의 주인 진사 이동범, 그는 한 나라의 진사까지 지냈음에도 한낱 수배자에 불과했던 백범 선생을 순수히 받아들여 융숭한 대우와 많은 노자를 쥐어주었던 이 진사의 넉넉한 품성, 그리고 독립자금을 대면서도 드러내지 않았던 그의 우국충절이 이 정자에 고스란히 서려있다.
현재 육모정이 있었던 석축 안에는 몇 포기의 고추가 햇볕을 받아 토실이 영글어가고 있다. 마치 백범과 이 진사의 돈독한 우정이 익어가는 것처럼….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그림·사진/ 박주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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