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56)=함평 이인정

화이트보스 2009. 1. 16. 16:18

▲함평 이인정

강산이 아름답기 남쪽에서 으뜸이리/ 삼라만상 그 경치를 어찌 다 거두우리/ 수양버들 잎은 지고 성긴가지 나부껴도/ 늦게 핀 연꽃이 바람일어 향기 그윽 풍겨오네/ 좋은 모임 오래오래 노소가 함께하니/ 잔을 들며 서로 즐겨 몇 세월이 지났는고. <안여기의 시>

함평군 나산면 나산리 대정마을 초입에 들어서면 정자가 한 채 서 있다.


▲사진(1)=400여년전 함평군 나산면 나산리 대정마을 어귀에 건립된 이인정. 이 정자는 지역 선비들이 젊은이들을 모아 ‘인(仁)’의 중요성을 강론했다.

▲사진(2)=옥녀낭자의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이인정 옆 연못. 이 연못가엔 푸르게 자란 창포가 길손을 정답게 맞고 있다.


▲함평 이인정

함평군 나산면 나산리 대정마을 초입에 들어서면 정자가 한 채 서 있다.

이인정(里仁亭)이라 했던가. 금방이라도 시조 한 수가 들려올듯한 이 정자는, 그 옛날 이곳을 지나는 가객들의 쉼터였으리라.

초복의 절기답게 적당히 내려주는 태양, 잔잔히 귀를 자극시키는 매미소리, 그리고 연방죽 위를 한가로이 날고있는 고추잠자리 몇 쌍…, 자연의 조화와 멋은 이인정과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수묵담채를 연상케했다.

이인정은 지금으로부터 400여년전, 그러니까 1694년(숙종 20) 마을의 공동 회합장소로 활용키 위해 죽산안씨(竹山安氏)가 주축이 돼 건립했다. 공자(孔子)의‘이인위미(里仁爲美: 어진 마을에서 사는 것이 아름답다)’라는 글귀를 따와‘이인정(里仁亭)’이라 이름했다.

이 정자는 처음 마을 뒷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후 수 차례의 중수를 거쳐 1832년(순조 32) 현 위치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특히 이 정자는 다른정자와는 달리 우리 전통문화의 미풍양속인 ‘인(仁)·의(義)·예(禮)·지(智)’의 정신이 절절히 배어있다. 이러한 정신은 이인정에서 해마다 행해지고 있는 풍습에서도 알 수 있다. 지역 선비들이 마을의 젊은이들을 모아 시(詩)와 예(禮)를 강론하고 덕업을 권장하며 이웃과 종족간의 화목을 위해‘인(仁)’을 가르쳤다.

‘이인정’이라는 현판은 조선시대 명필가 권수함이 썼으며, 정내(亭內)에는 나산 출신으로 조선 효종때 창평 현감을 지냈던 안여기(安女器)의 시문(詩文)을 비롯 대사헌을 역임했던 이언경의 시, 그리고 각종 제영문(題詠文)과 기문(記文) 등이 걸려 400여년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있다.

이인정 밑으론 수양버들이 축축 늘어진 아담한 연못이 자리하고 있다. 이 연못에는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안은 옥녀봉의 산그림자가 먹빛으로 드리워져 정취를 더해줬다. 주변의 풍광때문일까. 이 연못은 아름다운 전설 한 토막을 지니고 있었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이렇다. 옥녀봉에 살고 있는 한 낭자가 언제나 자기의 몸 매무새를 가다듬을때 이 연못을 거울로 삼았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연못이 수정처럼 맑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으리라.

이인정의 풍광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잠시 눈을 돌리면 400여년도 족히 넘었을 아름드리 노송(老松) 10여그루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인(仁)’을 중시하는 마을, 그래서인지 만나는 사람마다 인심도 후하다. 논일하는 동네어른들의 손짓에 이끌려 텁텁한 막걸리 한 잔을 들이켰다. 삭막한 세상이 촉촉히 가슴을 타고 녹아내렸다. 이인정을 돌아나오는 길손의 머리 위로 고추잠지리가 조용히 날고 있었다. 글/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그림·사진/ 박주하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