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58)=장흥 사인정

화이트보스 2009. 1. 16. 16:22



아아! 슬프구나. 사람은 가고 정자(亭子)만 남아 바람에 씻기고 비에 젖어 이름모를 잡초만 무성하구나….

장흥읍과 강진군 군동면의 접경인 국도변 설암산(雪岩山)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장흥 사인정(舍人亭), 이 정자는 장흥읍 송암리 예양강이 굽어 보이는 우거진 노거수 속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사진(1)=조선 세종조 때의 큰 선비 사인 김 필 선생의 정신이 서려있는 장흥 사인정. 정자 밑으로 예양강이 도도히 흐르고 있어 지나가는 길손에게 사인 선생의 올곧았던 정신을 전해주고 있는 듯 하다.

▲사진(2)=옛말에 유유상종이라 했던가. 사인 선생의 정신에 감동을 받은 백범 김구 선생이 상해 망명길에 앞서 잠시 이곳에 들러‘第一江山’이란 글귀를 남겼다.

 


정자의 주인은 조선 세종조 때 홍문관 부제학과 전라도 관찰사, 이조참판 등을 지낸 사인(舍人) 김 필 선생(1426~1470)이다. 사인 선생은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부귀영화를 버리고 장흥으로 내려와 은둔생활을 하며 후학을 양성하다 바람처럼 살다가 눈을 감은 조선의 카랑카랑한 큰 선비였다.

사인 선생의 올곧은 선비정신이 오롯하게 배어 있어서일까. 사인정은 여느 정자와는 달리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적막감이 감돌고 있다. 간간히 찾아주는 산새들의 울음소리와 솔바람만이 정자 처마 끝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이곳 정자의 분위기는 요즘 정치판과 너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정자 밑으로 예양강이 소리없이 흐르고 있고, 그 위로 솜털구름이 평화롭게 떠있어 한 폭의 수묵담채화를 연상케 했다. 마치 지고지순 했던 사인 선생의 성품을 닮은 듯…,

그런데 요즘 정치판은 어떠한가. 크고작은 선거를 앞두고 자신들의 이익 추구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일부 위정자들의 행태들…. 이같은 정치권의 이전투구를 지켜보면서 대쪽같은 성품으로 살아온 사인 김 필 선생이 간절하게 그리워진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50여년 전. 사인 선생은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당시 수양대군이 전조(前祖) 때 부터 내려오던 원로 신하들을 없애고 스스로 정권을 잡으려 하자 이를 통렬히 비판하고 그 이듬해인 을해년(乙亥年) 벼슬을 팽개치고 낙향했다.

사인 선생은 단종조에 충성의 뜻을 펴지못하자 장흥부 부산에 은거하면서 산막을 짓고 속세를 등진 채 초복(初腹)차림으로 평생을 지냈다는 일화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특히 사인 선생은 지역의 인재들을 모아 경사(經史)를 교육하면서 매월당 김시습과 강론했던 조선의 거유(巨儒)였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했던가, 정자의 뒷편 바위에는 1919년 3·1운동 직후 백범 김구 선생이 상해 망명길에 이 곳에 들러 유숙하면서 쓴‘제일강산(第一江山)’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음각돼 정자의 역사성을 더해주고 있다.

이 정자에는 중수기를 비롯 제영문, 기문 등 30여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그 가운데 1737년 가을에 쓰여진 연안(延安) 이 훈(李薰)선생의 시 한귀절이 당시 사인 선생의 기품을 말해주고 있다.

-단종대(端宗代)에 절개높은 신하 있었으니/ 그 이름 돌에 길이 남아있네/ 눈빛은 무궁하고 가람은 흐르는 소리 무궁하리/ 상(象)을 새긴 바위 우뚝 솟아있고/ 하늘과 땅 다같이 느릿거리네/ 뜻있는 선비 오래도록 감흥 일게하니/ 바람도 처량하고 비 또한 구슬퍼 하누나-

정자 끝에서 산새 한 마리가 지저귀고 있었다. 마치 그 옛날 이곳에서 시문을 읊으며 사인 선생을 그리워 했던 선비들의 비통한 마음을 달래기라도 하듯….



글/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그림·사진/ 박주하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