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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부춘정(富春亭)을 찾아가는 수요일 오후의 하늘가엔 뭉게구름이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길가엔 가을을 알리는 코스모스며, 정겹게 고개숙인 벼이삭들…. 마치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케하는 자연의 정경이다. 이 정자는 탐진강의 10리 여울물이 굽이도는 장흥군 부산면 부춘리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다.
정자의 주인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사직 후 이곳에 내려와 여생을 보낸 문희개(文希凱·1550∼1610)선생이다.
창건 연대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문공(文公)이 은퇴한 연대인 1598년(선조 31) 이후로 가늠해 볼 수 있다. 창건 당시 정자의 명칭은 문공의 호를 따서 청영정(淸穎亭)이라 이름했다.
▲사진(1)=탐진강 10리 물여울을 굽이도는 장흥군 부산면 부춘리에 자리한 부춘정. 이 정자는 임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공(戰功)을 세운 문희개 선생의 충절이 오롯히 배어있다.
▲사진(2)=이 정자의 원래 이름은 문희개 선생의 호를 딴 청영정(淸穎亭)이었으나 훗날 청풍김씨에게 소유권이 넘어가 ‘부춘정’으로 개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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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공은 선조때 사마시에 올랐고 임진왜란때는 계부(季父) 풍암공(楓菴公) 위세(緯世)를 도와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적을 섬멸, 그 전공(戰功)으로 고창현감에 제수됐다. 그후 정묘재란 때 왜적이 침범해 성(城)을 포위하자 문공은 아들 익명(益明)·익화(益華) 등과 함께 싸우다 적의 칼에 맞아 심한 부상을 당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분전, 마침내 적을 물리치고 성을 사수했다. 이처럼 공(公)은 국가를 위해서는 몸을 아끼지 않았고, 부모 공양에 있어서는 지역에서 소문난 효자였다.
이 정자는 공이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에 내려와 만년을 보내면서 후학 양성은 물론 인근지역 사림들과의 교분을 돈독히 쌓으며 장흥 지역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다.
장흥이 배출한 문장가 백광훈(1537~1582)은 장흥에 내려온 문희개의 인품에 감동해‘비 개인 맑은 강에 강물은 잔잔한 데 강가 짙은 꽃 속에서 푸른 물로 목욕하네’라는 내용의 시를 짓기도 했다.
특히 정자 뒷편에는 문희개 선생이 선조 임금을 그리워 하며 매일 북향재배 했다는‘망군대비(望君臺碑)’가 서 있어 이곳을 찾는 길손을 숙연케 하고 있다.
또 이뿐인가. 정자 밑 강물에 잠긴 바위에다 옥봉 백광훈이‘龍虎(용호)’라는 글씨를 흘림체로 새겼다. ‘龍湖’라는 말은 정자의 주인인 문희개의 충절을 찬양한 글로써, 한가로운 두 마리의 용이 호수 속에 잠겨 있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어 부춘정의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훗날 이 마을에 청풍김씨들이 들어오고 남평문씨들은 모두 이거해 나감에 따라 이 정자도 역시 청풍김씨 소유가 됐다.
이 청영정은 1838년경(헌종 4)에 청풍김씨 영동정공파의 후손인 김기성이 사들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춘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평면구성은 서측으로 2칸 대청을, 그 다음으로 중앙에 2칸 온돌방을 두고 전후로는 반칸 폭으로 툇마루를 두었다. 맨 끝 칸의 퇴칸은 누마루를 설치하였는데 이러한 구조는 이 지역 정자에서 가끔 볼 수 있는 형식이다.
부춘정 아래 용호 바위로 어느덧 석양이 떨어지고 있다. 피아노의 고음처럼 튀어오르는 물고기들의 모습이 낙조를 받아 더욱 장관을 이루고 있다.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그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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