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57)=함평 백화정

화이트보스 2009. 1. 16. 16:20


▲함평 백화정

먼지 푸석푸석 날리는 요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성인들은 무엇 때문에 앓고 있을까. 국가와 사회, 개인에게 변화를 크게 요구하는 이 시대야말로 부패의 원인과 결과가 뚜렷하게 드러나 한 차례 굿이라도 해야할 판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다. 조선말 큰 선비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가슴앓이를 지금의 지식인들도 똑같이 하고 있으니….


▲사진(1)=진주 정씨 정휴동이 세운 함평 백화정.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노사 기정진 선생을 비롯 조선 말 인근지역 선비들이 이 정자를 즐겨찾아 우국충절을 읊었던 유서깊은 곳이다.

▲사진(2)=정자 주변으로 아름드리한 팽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연못 터가 지금도 원형대로 보존돼 있다.


▲함평 백화정

함평군 월야면 외치리 칠봉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백화정(百花亭), 이 정자는 진주 정씨의 화정처사(花亭處士) 정휴동(鄭休東)이 세워 함평 지역은 물론 인근의 선비들까지 이 곳을 드나들며 시문을 읊으며 우국충절을 노래했고, 특히 조선 말 장성 출신 유학자 노사 기정진 선생의 정신과 사상이 오롯히 배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백화정을 찾아가는 길목엔 개망초가 지천으로 흐드러져 있고 주변엔 아름드리한 팽나무들이 군락을 형성, 간간히 들러주는 길손을 말없이 맞아 세월의 무상함을 일깨워 줬다.

이름 모를 화초와 연못가의 고목들, 정자로 오르는 계단 양쪽 뜰에 자리한 관상수와 상록수 등이 자연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이 정자에는‘백화정’이란 현판과 함께‘음향제’란 또 하나의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또 두 개의 현판 옆으로는 노사 선생이 쓴‘백화정 중수기’와 주인 정휴동의 시문, 그리고 이곳을 자주 왕래했던 지역 선비들의 시문이 내걸려 정자의 역사와 내력을 잘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정자를 세운 정휴동의 빼어난 시 한 수가 순례자의 시선을 부여잡는다.

-높고 정결한 이 땅에 삼칸집 마련하여/ 속세를 떠나 유유히 예서 한평생 마치려 함일레/ 난간을 스쳐 흐르는 맑은 내는 귀인의 패옥 소리인양 들리고/ 계곡을 끼고 있는 양쪽 초록 봉우리들은 소라처럼 다 붙었다/ 진나비 사슴이랑 같이 사는 터라 학은 분명 나의 시벗이요/ 낚시대 있으니 고기인들 못 닦을까/ 집에 오면 용수 낀 술항아리가 있잖은가/ 꽃과 돌 뜰에 차 있고 시객은 방에 가득차 있어/ 산속 집에서 생활하는 계획이 이만하면 넉넉하리.-

정휴동의 시문을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는 동안 정자 끄트머리에선 묏새들의 지저귐이 내리꽂히는 염천의 태양을 한풀 끌어내리는 듯 했다.

백화정, 이 정자의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노사 선생의 중수기로 보아 본래 초가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노사 선생의‘백화정 중수기’에 따르면 개수 때 아홉칸의 둥근 기둥에 주련을 달고 ㄴ자형 마루와 문을 떼었다 달았다 할 수 있는 간살막이 방이 두 개 있었고, 처마에 차양을 단 건평 15평 규모의 아담한 초가였으나 여러차례 중수를 거쳐 목조기와 건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때 백화정은 함평 지역의 인재 양성을 위한 후학들의 글방으로, 또는 선비들의 토론장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앞에서도 언급을 했듯 조선말 대유학자 노사 기정진이 내왕 하여 강론을 펴기도 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지식인들의 양심과 행동을 일치시키려고 부단히 애썼던 흔적인 역력히 배어있는 백화정, 이 정자를 둘러보고 겹겹히 이끼 낀 돌계단을 내려오면서 오랜만에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흰구름 몽실 떠있는 푸르른 하늘가엔 고추잠자리떼가 자유로이 날고 있었다. 문득, 파르르 떨고있는 잠자리의 날갯짓에서 어지럽게 돌아가는 세상이야기가 오버 랩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그림·사진/ 박주하 화?/texta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