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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읍 기각리 구기산 밑으로 영수천이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녹음이 하늘 가득 우거진 초여름 수요일 오후, 500여년 인고의 세월을 영수천과 함께 보냈을 정자 한 채가 말없이 길손을 맞았다. 흐드러진 망초며 이름모를 잡풀들이 주변을 무성하게 애워 쌓인 채….
영파정(潁波亭), 이 정자는 함평 출신 조선의 선비 영파정(潁波亭) 이 안(李岸·1414~?)의 올곧은 정신과 기개가 서려있는 곳이다.
▲사진(1)=당시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고 보위에 오르려는 계획을 세우자 영파정 이 안은 이에 반대하고 함평으로 내려와 이 정자를 짓고 은둔했다.
#그림오른쪽#
▲사진(2)=영파정에서 바라본 함평 영수천. 영파정 선생의 올곧은 선비정신을 닮은 까닭인지 영수천은 예나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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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파정(潁波亭), 이 정자는 함평 출신 조선의 선비 영파정(潁波亭) 이 안(李岸·1414~?)의 올곧은 정신과 기개가 서려있는 곳이다.
원래 이 정자가 건립된 계기는 1454년(단종2)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고 보위에 오르려는 계획을 세우게 되자 영파정 이 안이 이에 적극 반대 하고 함평으로 내려와 정자를 짓고 은둔생활을 했다.
이 안은 자가 야부(野夫), 호는 영파정(潁波亭), 본관은 함평으로 원래 직산에서 살았으며 세종조에 진사가 되었다. 1454년(단종2) 박팽년의 천거로 남부참봉에 제수된 후 이듬해 단종 폐위론이 대두되자 항거하다 벼슬을 버리고 신말주와 더불어 나주 금안동으로 은거했다.
그 후 그는 다시 선조의 고향인 함평 기산으로 이거하여 이 정자를 짓고 중국의 허유와 소부를 자처하며 티 없이 맑은 여생을 보냈다.
말년에 조정에서 사헌부장령으로 징소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유유자적 하며 시문을 읊고 후학을 양성하며 생을 마쳤다.
이같은 이 안의 생애와 사적을 연결지어 볼때 이 정자의 창건 연대는 1450~1460년대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정자는 처음 건립 당시에는 이 안의 호인 영파정을 정자의 이름으로 했으나 이후 때로는‘영수헌’이라고도 불리었다.
이후 영파정은 영수·관덕정으로 지칭되면서 함평군의 활터와 정자로 성격을 확립해 갔다. 그리고 1933년과 1966년에 담장 등을 보수하여 함평인들의 궁도 무예의 도장으로 활용 했으나, 영수천의 직강공사로 인해 과녁이 멀어지게 되자 궁도장의 구실을 못하게 되었다.
영파정은 1988년 지방 유형문화재 자료 제168호로 지정됐으며, 현재 한국국악협회와 대한시우회 함평지회가 건물을 관리하고 있다.
영파정은 함평읍의 진산인 기산을 배후로 하여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정자 좌우측으로는 가옥들이 들어서 있고 비교적 높은 기단 위에 동향을 하고 있다. 정자 좌측에는 관리사가 있고, 우측 뜰에는 ‘영파정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영파정의 건립 경위를 기록한 유허비로 원래는 도서관 옆에 있었던 것을 1987년에 이 곳으로 옮겼으며 1807년에 이민보가 글을 지었다.
영파정은 현재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내부는 좌측 측면 1칸만을 온돌방으로 꾸미고 모두 마루를 깐 대청으로 돼있다.
조선의 지조있는 선비 영파정 이 안, 수양대군의 옳지못한 행위를 차마 보고만 있을수 없었던 그는 부귀영화를 버리고 낙향, 자연과 벗하며 푸르른 대나무처럼 살았다.
그의 정신이 면면이 이어져 오고 있음일까. 영수천은 500여년 전 그날처럼 그렇게 소리없이 흐르고 있다.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그림·사진/ 박주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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