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53)=보성 죽곡정사

화이트보스 2009. 1. 16. 16:11


▲보성 죽곡정사

1895년 단발령을 거부하며 선비의 기개를 세운 보성의 도학자 회봉 안규용(晦峰 安圭容·1873~1959)의 정신이 밴 죽곡정사(竹谷精舍)를 찾았다.

보성에서 북쪽으로 40리 떨어진 곳에 우뚝하게 솟은 조천봉(朝天峰)이 있다. 그 봉우리 아래 깊숙이 자리잡은 곳이 죽곡(竹谷)이라 하는데, 이곳에 희봉 선생이 투철한 선비정신으로 제자들에게 강학(講學)하던 죽곡정사가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학생은 없고 서당만 남아 회봉 선생의 손자 안태순씨(65)가 정사(精舍)를 보살피고 있다.

▲사진(1)=1920년에 지어진 죽곡정사는 조선말 회봉 안규용 선생의 올곧은 선비 정신이 배어있는 보성의 정신문화의 요람이다.

▲사진(2)=보성 지역 청년들의 강학소로 활용된 죽곡정사 앞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하나 있다. 이 연못은 회봉선생의 기개를 닮은 듯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


▲보성 죽곡정사

때마침 내린 폭우로 행여 정사에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하는 안씨의 표정에서 조부(祖父)의 서당에 대한 애착을 읽을 수 있었다.

죽곡정사는 1920년 일제(日帝)가 강제로 학생들을 학교에 입학시키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었던 회봉이 산중에서 글을 가르치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집을 사서 서당으로 건축했다.

이때가 회봉의 나이 48세로 도학(道學)의 확고한 경지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후 13년간 이곳에서 강학해 오던 회봉은 일제의 서당 인가를 받으라는 독촉이 심해지자 1934년 8월에 30여명의 제자들을 해산하고 홀연히 지리산으로 입산하자 제자들이 선생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해 현건물을 재건했다.

그러나 6·25 한국전쟁때 2동(棟)의 건물만 보존되고 나머지 3동(棟)의 건물이 철거 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조그만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회봉의 체취가 서린 여러개의 기둥들이 낯선 손님을 반긴다. 정사와 함께 심었다는 등나무가 정사의 역사를 대변하는 듯하다.

이 곳 정사에는 각각의 독특한 이름이 있는데 대청 중앙에는 한말(韓末)에 판서를 지낸 윤용구가 쓴 ‘죽곡정사(竹谷精舍)’라는 현판이 있고 동쪽에는 ‘백천당(百千堂), 서쪽에는 ‘양정제(養正齊)’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몇해 전 폭우로 무너진 삼청교(三淸橋)는 정사에 들어올때 반드시 시냇물을 세번 건너야 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회봉은 보성군 복내면 유정리에서 죽산 안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미 초년인 21세때 ‘척동학변(斥東學辯)’을 지었다가 동학도(東學徒)들에게 잡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한 회봉은 23세 때인 1895년 단발령이 내려지자 ‘목이 없는 귀신이 될 지언정 머리를 깎는 사람이 되지는 않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보였을 정도로 강경했던 인물이다. 조금 뒤늦은 29세(1901년) 때부터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瑄) 문하에 들어가 수업을 받은 뒤부터 도학의 의리론에 대한 신념을 굳혔다. 1910년 경술합방이 됐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회봉이 처음 취한 행동은 다른 유학자들과는 좀 달랐다. 회봉은 괴나리봇집을 싸 짊어지고 먼저 사고(史庫)가 있는 무주 적상산을 찾아갔다. 이것은 왕조의 정통성을 재확인하고자 했음이라.

62세 때인 1934년 지리산에 들어가 초당을 짓고 학문과 수련에 몰두하며 망국의 설움을 달랬다. 화엄사에서 노고단쪽으로 10리 남짓 떨어져 있는 이곳에는 회봉이 새겨놓은 ‘천인대(千刃臺)’, 서산초려(西山草廬)’, 세심폭포(洗心瀑布)’등의 각자가 바위에 남아있어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케하고 있다.

속세와 완전히 인연을 끊고 지리산에 은거하던 회봉은 뜻하지 않은 사건에 연루돼 3개월간의 옥살이를 치러야 했다.

지라산에는 아들 종선(鐘宣)과 문인 박규현(朴奎鉉)이 따라와 있었는데, 이들이 1936년 봄 서울에 다녀올때 박규현이 써 놓은 일기가 말썽이 되어 회봉까지 검거됐다.

박규현의 일기 속에는 ‘선왕의 도읍에 모두 오랑캐와 날짐승이 날으니 차마 눈뜨고 못보겠다’라는 부분이 문제가 됐던 것이다.

그러나 일경(日警)도 회봉의 기개를 꺾을 수는 없었다.

회봉의 지리산 은둔은 ‘세월이 부득이하고 의리가 세상에 나갈 수 없다면 조수(鳥獸)와 더불어 무리지어 살 수는 없다는 공자의 가르침에 위배되더라도, 세상에 나가 지위나 탐내고 수입이나 좋아하여 무슨 짓이라도 해서 개나 돼지만도 못하게 살기보다는 차라리 한몸을 고결하게 지켜 깊은 산이나 거친 들판에 들어가서 조수와 함께 무리지어 사는 것이 낫다’라 하여 일제에 항거하는 선비의 곧은 기개를 보여준 것이다. 글/ 김선기 기자 kmsg@kjtimes.co.kr 그림·사진/ 박주하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