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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죽천정
외롭게 앉혀진 정자 한 채, 그 밑으로 촬영장 세트처럼 놓여진 간이역, 그리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두 어평의 남짓한 시골 다방….
마치 영화속의 정겨운 한 컷의 씬을 연상케 하는 60~70년대 풍이 자연 그대로 남아있는 보성군 노동면, 면 소재지를 지나 광곡리 화전봉(花田峯) 기슭에서 보성강의 지류를 내려다보며 세상을 관조하듯 머물러 있는 죽천정을 찾았다.
▲사진(1)=‘호남 5賢’으로 추앙받고 있는 죽천 박광전 선생의 올곧은 선비정신이 스며있는 죽천정. 이 정자에는 그가 남긴 각종 시문이 걸려있어 선생의 학문의 경지를 가늠케 하고 있다.
▲사진(2)=죽천정에서 내려다보이는 보성강 지류는 죽천 선생의 우국충절을 닮은듯 심한 가뭄기에도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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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죽천정
이 정자의 주인은 죽천(竹川) 박광전 선생(朴光前·1526~1597)으로, 그는 김인후 기대승 유희춘 이일제와 함께 ‘호남의 5현(賢)’으로 불리우고 있는 조선의 큰 선비이다.
그의 우국충절을 닮아서일까. 정자 밑으로 흐르는 강물은 심한 가뭄에도 변함없이 포만감으로 흐르고 있었다.
죽천정은 박광전 선생이 생전에 정자를 지어 성리학을 공부하고 후학을 교육하면서 은거했던 유서깊은 곳이다. 훗날 후손들이 죽천 선생의 유지를 기리기 위해 1946년 공사를 시작, 5년만에 완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정자는 단층의 팔작지붕 골기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이뤄졌으며, 중앙에 제실을 갖춘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죽천정에는 현재 ‘죽천정기’(竹川亭記) 2편과 ‘죽천정사실기’(竹川亭事實記), 안방준이 쓴 박광전의 행장일반, 그리고 죽천 선생의 각종 시문이 걸려있다.
조선의 큰 선비 죽천.
그는 1526년(중종 21) 조성면 용전리에서 진원(珍原) 박씨 후손으로 태어났다. 29세에 진사에 급제했으나 어지럽게 돌아가는 조정의 꼴에 환멸을 느낀나머지 벼슬을 버리고 낙향, 은둔생활을 하며 학문에 전념하다 41세때 이퇴계 선생을 만나 본격적으로 성리학에 입문했다.
이 무렵 죽천 선생은 퇴계와의 만남을 통해 더욱 학문의 깊이를 더하게 되는데, 그의 학문적 행적은 ‘우계기’(遇溪記)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우계기’는 그가 한동안 문덕면 죽산리 대원사 골짜기에 머물면서 자연을 노래하는 시문을 지었다. 이 글은 당시 경향 각지에서 명문으로 널리 읽혀져 이곳에‘우계정’까지 건립케한 일화를 남겼다.
또 지천명 중반(56세)에 이르러서는 선조임금의 부름으로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돼 왕세자의 스승으로 온갖 정성을 다해 세자를 가르쳐 명성을 떨쳤다.
죽천 선생은 붓을 든 문인의 신분임에도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남에서 첫 번째로 궐기해 문인들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 왜군 섬멸에 앞장섰다.
이어 그는 1592년 정유재란때 의병을 모아 왜군을 대파하고 72세때 군영(軍營)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죽천 선생 세상을 떠나자 지역 선비들은 물론 조정에서 까지 전라감사를 보내 선비의 죽음을 슬퍼하며 명복을 빌었다 하니, 그의 문필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훗날 후학들은 그의 학덕을 추모해 미력면에 용산서원(龍山書院)을 세워 경향각지 수많은 문인들의 강학장으로 활용해오다 1871년 고종 8년에 철폐됐다.
‘광곡’이란 간이역을 사이에 두고 보성강과 마주하고 있는 죽천정.
망초 속에 묻혀있는 정자의 용마루에 어디서 날아왔는지 까치 한 마리가 구슬피 울고 있다.
그림·사진// 박주하 화백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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