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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만들어 놓은 좋은 터에 한 정자 높이 섰으니 사람의 그림자 아른아른 거울 속에 흐르네/ 어린새끼 송아지 저 언덕에서 바람받고 울고 백구(白鷗)는 달을 따라 진 물가로 내리네/ 문장(文章)이 가신지는 이미 여러 성상(星霜)이 지났지만 풀과 나무에는 지금(只今)도 정채(精采)가 머물러 있네/ 오직 주인만이 선업(先業)을 완수하였으니 늦게도 다시 영귀(詠歸)하는 것을 보겠네.
조선말 장흥 출신 선비 김익검이‘경호정’의 주인 운암 위덕관(雲巖 魏德寬·1547~1628)선생을 그리며 읊은 시이다.
▲사진(1)=조선 말 선비 운암 위덕관(雲巖 魏德寬·1547~1628)선생은‘가족 간의 화목이 곧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는 사상을 폈다. 경호정은 운암 선생의 휴머니즘 사상이 묻어있다.
▲사진(2)=경호정에서 내려다 본 굽이도는 탐진강은 마치 한 폭의 수묵담채화를 연상케 하듯 평화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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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경호정은 국가와 사회의 근원을‘가족의 화목’으로 여기고, 이를 모범적으로 실천했던 곳이기도하다.
경호정(鏡湖亭)은 이름 그대로 정자가 호수 잠긴듯 투영돼 마치 거울을 들여다 보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정흥의 모든 정자가 그렇듯 경호정 주변의 풍광은 맑고 고요한 탐진강과 어우러져 한 폭의 수묵담채화를 연상시키고 있다.
이 정자의 주인은 피 튀기는 난세를 뒤로하고 이곳 심산유곡으로 들어와 은거하며, 지역의 사림들과 어울려 시문을 논했던 조선말 선비 운암 위덕관(雲巖 魏德寬·1547~1628)선생이다.
운암 선생은 그다지 큰 벼슬길은 나서지 못했지만, 의(義)를 몸소 실천해 선비의 바른 정신을 교육했고, 특히‘형제간의 우애가 곧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했던 조선의 휴머니스트였다.
그의 가르침을 받아 여섯 형제가 화목하게 살면서 조선의 대유학자 민효봉(閔老峰) 선생 문하에서 학문에 정진했다.
이때 여섯 형제들과 교류했던 선비들은 이민기(李敏琦), 김세장(金世長), 백후채(白後采) 등이다. 이들은 운암의 자제들과 무릎을 맞대고 세상의 온갖 흙탕물 속에서도 거울같이 맑게 흐르는 탐진강을 내려다보며‘큰 물줄기의 근원’을 깨우쳤다.
호남록(湖南錄)에 따르면‘장흥의 북쪽엔 의절 마을’이란 문구가 기록돼 있는데, 이는 운암 선생으로 부터 뿌려져온 위씨 일가(魏氏 日家)의 충효사상을 가르키는 말로 후세에 귀감이 되고 있다.
현재 경호정 안에는 경호정기(鏡湖亭記)를 비롯 경호정 상량문, 경호정 중건기와 원운(原韻)·차운(次韻) 등 현판이 19개나 걸려있어 정자의 역사를 조용히 말해주고 있다.
충(忠)과 효(孝)는 내림이라 했던가, 가족주의가 망가지고 있는 요즘 세상에서 경호정은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구름 뿌리를 파헤쳐 작은 루(樓)를 지으니 서늘한 풀빛 그림 가운데 흐르네/ 한 강의 밝은 달은 소동파의 언덕이요, 십리에 푸른 연기는 위야(魏野)의 물가로다/ 한낮의 종소리는 꽃밖에 들리고 고기잡는 배는 반이나 비속에 머물렀네/ 그대에게 묻노니 창랑(滄浪)에서 사는 취미는 두 눈으로 그 좋은 풍광을 다 보았으리라.-
바위 위에 외롭게 서있는 경호정의 체취를 뒤로하고 이끼 낀 돌계단을 한 층씩 밟아 내려왔다. 한 줄기 강바람이 시 한 귀절을 읊조리듯 귓가에 맴돌았다. 글//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그림·사진/박주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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