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62)=진도 벽파정

화이트보스 2009. 1. 16. 16:33





 

 

 

 

 

 

 

 

 

 

▲사진(1)=고려조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진도의 관문 역할을 했던 벽파진과 벽파정, 현재 벽파정은 흔적 조차 찾을 길 없어 아쉬움을 주고 있다. 신동국여지승람 등 각종 문헌에 따르면 정자는 현 벽파 파출소 뒷편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사진(2)=벽파진에서 내려다 본 진도 앞바다의 푸른 물결은 옛 영화를 추억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출렁이고 있다.


‘천형(天刑)의 땅’에서‘천혜(天惠)의 섬’으로, 너무도 아름다워 차라리 슬픈 진도. 특히 벽파진과 벽파정에 얽힌 수 많은 이야기는 감명 깊은 한 편의 영화이다. 그래서일까, 고려조로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시인묵객들이 이곳을 드나들며 시 한 귀절씩을 남겨두고 홀연히 뭍으로 향했다.



-숲 사이 소로길을 모두 다 다녀오니/ 이따금 포구에 고깃배 돌아오네/ 바닷물은 온 지구를 둘렸는데/ 산 하나 우뚝서서 하늘가를 막았구나/ 외로운 태양은 뗏목 타고 온 손님이던가/ 아득한 푸른구름 선경에 솟는구나/ 돌아올제 느낀 것 많기에/ 술에 취해 강남풍경을 쓰노라-



이 작품은 고려조 때 평장사(조선시대의 정승과 같음)를 지낸 고조기(高兆基)가 ‘벽파정(碧波亭)’의 아름다움을 읊은 시이다.

옛부터 길손이 끊이질 않았던 진도의 관문 벽파진, 그 옆에 세워진 작은 정자(亭子)는 이별의 주연(酒宴)을 베풀었던 장소로 많이 쓰였다.

사실 벽파정 보다는 벽파진이 세상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졌다.

이조 말엽인 1864년에 제작된 대동여지도를 보면 해남의 삼산면 일부에 삼촌이 있고 이곳은 진도군 땅이라 표기한 대신 진도 섬 안에 있는 벽파진은 해남땅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또 이 지도를 만든 김정호가 쓴 ‘대동지지’란 책을 보면‘벽파진은 고려 때 대진(大津 ; 큰 나루)이라 부르던 곳으로 건너편 해남 땅 삼기원에 가는 큰 길목이라 나루를 지키는 진장(津將) 한 사람을 두었다’고 적고 있다.

세월이 흘러 진도가 연륙 됨에 따라 영화로웠던 벽파정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 없고, 벽파진 마저 쇠락해져 이곳 사람들의 추억 속으로 잠겨들고 있다.

신동국여지승람 등 각종 문헌에 따르면 벽파정은 현 벽파 파출소 뒷편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정자 옆으로는 이 나루의 무사함을 비는 당집이 최근까지 있었으나 지금은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 당집에 얽힌 전설은 벽파정의 애틋함 만큼이나 감동스럽다.

… 아주 아득한 옛날 옛적에 하늘구렁이가 새벽녁이면 간혹 이곳 벽파진 앞바다에 나타나 흰거품을 품어 온 바다를 짙은 안개로 뒤덮었다. 이 하늘구렁이의 전신에 넘실거리는 방석만한 비늘은 푸른 빛을 나타내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또한 발 하나가 범선의 키(箕) 만큼한 큰 지내가 이곳 작은 섬에 살고 있었는데, 가끔 하늘구렁이와 지내가 싸움이 붙는 날이면 벽파 앞 바다물이 뒤끓고 그 파도는 하늘을 찌르는 듯 하였다….

이 흥미 진진한 이야기는 그 유명한 이수광의‘지봉유설’의 한 대목이다. 이와같이 태고의 전설을 안고 있는 벽파진은 진도읍에서 동북방으로 12km 떨어진 항구로써, 육지와 연결되는 유일한 포구였다.

벽파진이 벽파정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정유재란 때 였다. 1597년 8월 29일 이순신 장군은 열 두척 배를 몰고 이곳에 도착해 보름 간을 지낸 뒤 해남 어란포에 나타난 왜군의 선단을 보고 9월 15일 우수영으로 들어가 명량 대첩을 이룬 것이다.

삼별초군 역시 진도에 들어올 때 이 나룻터를 이용 했고, 여몽 연합군의 회유 회담 장소로 쓰인 기록이 지금도 전하고 있다.

진도 사람들의 추억 속으로 사라져버린 벽파진과 벽파정, 오늘도 벽파진을 휘돌고 있는 남해의 푸른물은 옛 영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속절없이 출렁이고 있다.

그림·사진/ 박주하 화백

글 /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