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63)=진도 압구정

화이트보스 2009. 1. 16. 16:34

▲진도 압구정

누가 진도를‘유배의 땅’이라 했는가. 고려 말 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진도는 반골 정신의 텃밭이었다. 하여, 진도가 정치·경제·사회·문화를 통틀어 근·현대사에 상당한 역할을 차지해 오고 있음은 바로 그러한 연유이리라.



▲사진(1)=고려 말 두문동(杜門洞) 72현 가운데 한 사람인 조희직 선생이 진도로 유배와서 초막을 짓고 임금을 향해 조석으로 북향재배 했다는 압구정. 현재는 정자의 흔적은 찾을 길 없고 비석만 서 있다.

▲사진(2)=조희직 선생의 우국충절이 서린‘압구정’이 연유돼 현재의 지명이 된 진도군 군내면 정자리 마을 전경.



▲진도 압구정

남도의 반골정신이 오롯히 배어있는 진도군 군내면 정자리 압구정을 찾아가는 길목엔 가을 답게 갈대꽃이 지천으로 흐드러져 있었다.

‘정자리’라는 지명(地名)으로 보아 이 지역은 꽤 유명했던 정자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은 세월에 녹아 정자의 흔적은 찾을 길 없고 잡초 우거진 산기슭에‘압구정’이란 돌비석 하나가 남아‘정자리’라는 마을이름 유래를 말없이 대변해 주고 있다.

‘정자리’라는 지명은 고려 공민왕 때 충신 정언공 조희직 선생의 애국충절이 절절히 배어있는 곳이다.

정언공은 고려 말 충신 정몽주 등과 함께 고려왕조를 온 몸으로 지켜내다 끝내 멸망에 이르자 통한의 가슴을 안고 재야에 묻혀버린 두문동(杜門洞) 72현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정언공의 충절은 그 옛날 정자터가 있음을 알려주는 비문에 새겨진 그의 시문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외로운 섬 임금님 계신 곳은 멀고/ 파도이는 바다는 귀신의 세계와 이웃 하였네/ 뱃사공을 불러서 건너 가노니/ 세상에 내가 찾는 사람 적더라-

정언공은 고려 시중공을 지낸 창녕조씨 한용의 아들로 고려 공민왕 때의 이름난 충신이었다. 그가 정언 벼슬에 있을때 신돈을 물리치려다 실패로 돌아가자 가흥현(현재 진도)으로 유배되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이곳 섬에 갇혀 외로운 귀향살이 하면서도 고려 왕조가 있던 개성 쪽을 향해‘압구정’이란 초막을 짓고, 아침 저녁으로 북향 제배하며 망국의 슬픔과 임금에 대한 충절로 신하로써의 도리를 다했다.

훗날 이성계가 등극해 사람을 보내 정언공에게 벼슬 할 것을 수 차례 권했으나 끝내 바다를 건너지 않았다.

그가 남겼던‘하늘에 어찌 해가 둘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유명한 일화는 지금도 세인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있다.

특히 정언공과 이성계는 사촌동서 관계였다.

문득, 그들의 혈육관계를 접하면서 요지경처럼 벌어지고 있는 정치판이 떠올려진다. ‘원님네 집 강아지’만 돼도 꼬리를 한껏 치켜 세우고 거드름을 피우는 세상이 아니던가. 그런데 동서가 조선을 개국(開國)해 임금이 됐음에도 그는 혈육의 정까지 끊고 외로운 섬에 남아‘불사이군(不事二君)’했다하니, 그의 대쪽같은 선비정신은 오늘날‘진도 정신’의 자양분이 됐다.

고려의 충신 정안공 조희직, 그는 또한 경학에 밝고 시문에 능해 많은 글을 남겼으나 잦은 병화로 인해 소실되고 현재 두 수만이 남아 이곳 정자리에서 서 있는 비문에 새겨있다.

-밤은 고요하고 바람도 일지 않는데/ 찬 달빛에 그림자만 흐를 뿐/ 푸른 강물 한 줌 떠서 옷깃 펼치고 나그네 시름 씻으리-

이 시를 읽노라면 다정다감하고 풋풋한 정신을 지녔던 정언공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부귀영화를 팽개치고 자신의 호를‘강호산인(江湖山人)’이라 자칭하며,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다가‘천형의 섬’에서 끝내 생을 마감했다.

지금은 기와 한 조각 찾을길 없는 압구정, 오늘 한 선비의 통울음처럼 그 빈자리엔 억새만 수북히 솟아 싸르락 거리고 있다. 그림·사진//박주하 화백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