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65)=해남 녹우당

화이트보스 2009. 1. 16. 16:37

해남 덕음산을 뒤로하고 그 줄기인 성매산, 옥녀봉, 호산을 잇고 들어서 있는 해남군 해남읍 연동, 이곳은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실학사상을 묻고있는 녹우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 터는 고산의 5대조인 어초은이 터를 잡았으며 현재 고산의 14대손인 종손 윤형식씨가 살고 있다.

이곳은 ‘지명총람’에 보면 “본래 해남군 군일면의 지역으로써 연못이 있어 연못골 또는 연동(蓮洞)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보아 연동의 이름은 마을 앞에 연못이 있어 연동으로 이름 지었다고 하며 현재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인공적으로 조영한 연못이 있다. 호구 총수에는 백연동(白蓮洞)이라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연동에 와 가장 먼저 부딪치는 오랜 역사의 흔적은 500년 된 늙은 은행나무에서 부터 시작된다. 아름드리 몸통에서 치바치고 있는 가지들은 오랜 세월의 줄기처럼 느껴진다.

연동의 가장 중심인 녹우당(綠雨堂)도 이 은행나무에서 그 유래가 연원 한다. 일설에 따르면 이 은행나무 잎이 바람에 떨어지는 모습이 비오는 것과 같다하여 ‘녹우당’이란 이름을 지었다. 이 유래는 사랑채 문을 열고 앉아 있을때 비자나무 숲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흡사 비오는 소리와 같다하여 붙여졌다. 또는 그 푸르름이 선비의 변함 없는 지조를 상징하는 뜻으로도 해석하는 등 여러 설이 있다.

은행나무 뒤로 높다란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녹우당이 나온다. 이곳의 가장 상징적인 고건축물이다. 녹우당은 고산이 수원에 있을 당시 효종이 스승이었던 고산 윤선도에게 하사한 집으로 고산이 82세 되던 1669년 이 사랑채를 뱃길로 해남까지 옮겨와 다시 지은 집이다.

현재 이 집에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헛간, 안사당, 어초은 사당, 고산사당 등이 있다. 원래 호남 양반집의 건축양식은 ‘ㄱ’자이거나 ‘ㄴ’자 집으로 녹우당이 들어서면서 서울지방 양반가와 같이 ‘ㅁ’자 집이 되었다. 이러한 건축양식은 현산면 백포리에 있는 윤두서 고가도 이런 ‘ㅁ’자 형태였다고 하여 녹우당의 영향이 미친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이 집은 아흔아홉칸이던 것이 별채가 불에 타 없어지고 지금은 55칸 만 남아 있다.

연자방아가 놓여 있는 유물관을 들어서면 국보 제240호인 공제 윤두서의 자화상을 비롯 보물로 지정된 어부사시사 , 오우가 등이 담긴 고산의 수적관계 문서와 지정 14년 고려조 공문왕 3년(1354년) 노비문서 등 고산 윤선도와 해남 윤씨들이 남긴 유물 2천500여 점이 보관돼 있다.

보물 제481호로 지정된 해남 윤씨 가전고화첩은 지본수묵(紙本水墨)혹은 담채(淡彩)한 소품들을 체계없이 조성한 것으로써 크기나 소재, 기법이 다양하여 공제회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또한 보물 제481호인 윤고산 수적관계 문서는 고산의 수적(手蹟)과 고산에 관계되는 문헌을 일괄해서 지정한 것이다. 여기에는 금쇄동집고, 금쇄동기, 산중신곡이 있고 고산의 관계문서로는 은사첩, 윤고산 출계례조입안이 있다.

보물 제483호로 지정된 노비문권은 고려시대의 노비문서로 소지(所志) 6장, 입안(立案) 2장, 모두 8장으로 돼 있으며 이두문(吏讀文) 표기로 송광사의 노비첩과 함께 현재 알려진 고려시대의 유일한 문서다.

이외에도 해남 윤씨들이 남긴 많은 유물들이 전시돼 있어 그때의 영화를 느끼게 해준다.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