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64)=완도 보길도 세연정

화이트보스 2009. 1. 16. 16:36










 

 

 

 

 

 

▲사진(1)=고산 윤선도가 한국 가단의 백미로 꼽히는‘어부사시사’를 지었던 완도 보길도 세연정.

▲사진(2)=격자봉 밑에 자리한 세연지(洗然池)는 세연정과 함께 고산의 자연주의 사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완도 보길도 세연정

길가에 흐드러진 코스모스 향내를 가르며 광주에서 얼마나 달렸을까.

고산 윤선도 선생(1587~1671)의 발자욱을 더듬기 위해 완도 보길도 세연정을 찾아 떠났다. 완도읍을 지나 화흥포에서, 다시 보길도행 철부선에 취재차량을 실었다. 가을의 햇빛이 잘게 부서지는 보길도 앞 바다엔 금방이라도 낭랑한 고산 선생의 ‘어부사시사’가 들려오는 듯 하다.

-내일이 또 없으랴 봄 밤이 몇 번 새리/ 배 붙여라 배 붙여라/ 낚대로 막대 삼고 시비를 찾아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어부사시사’ 춘사 전문>

완도 본도에서 1시간여 떨어진 외로운 섬 보길도. 이 곳은 고산 윤선도 선생의 풍류사상과 한국 가단의 산실로 자리해왔음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보길도 세연정은 고산 윤선도가‘어부사시사’를 지었던 곳이다.

그러니까,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에 들어온 것은 1637년 그의 나이 51세 때였다. 인조 14년 병자호란으로 조정이 강화도에 피난하자 봉림대군의 사부였던 고산은 왕세자를 보위하고자 급히 강화도로 갔다. 그러나 이미 인조대왕은 남한산성으로 옮겨 적과 대항하다가 항복한 후였다. 이 소식을 접한 고산은 세상을 자연에 묻혀 살겠다는 결심을 하고서 뱃머리를 제주도로 돌렸다.

제주도를 항해하는 도중 고산은 태풍을 만나 잠시 보길도에서 대피하던 중 산수의 수려함에 감탄해 이곳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고산은 보길도에 낙원을 건설했다. 포구가 보이는 자리에서 속세의 티끌을 씻어 낸다는 뜻으로, 세연정(洗然亭)을 짓고 연못(洗然池)을 팠으며, 이곳에서 5리 남짓 산 쪽으로 들어간 곳에 낙서재(樂書齋)를 지어 거처를 삼았다.

고산의 보길도 생활은 ‘가장유사(家藏遺事)에 자세히 전하고 있다.

- … 아침이면 경옥주 한 잔을 마시고 몸을 단정히 한 후 자제들을 가르쳤다. 때로는 홀로 죽장을 짚고 낭영계(郎詠溪)에 나가 노래하고 날씨가 좋은 날이면 반드시 세연정에 나갔다. 세연정에 갈 때는 술과 안주를 충분히 준비시켜 조그만 수레에 싣고 세연정에 이르면 자제를 곁에 앉히고…’

이처럼 환락과 풍류를 즐기던 고산에게 있어 보길도는 두가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하나는 보길도가 절대왕권에 의해 유배된 곳이 아니라 고산 자신이 스스로 선택해 가꾸고 자신을 세속으로부터 격리시킨 땅이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고산으로 하여금 정신세계를 열고 완전한 자유인이 되게 한 땅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양반들의 난해한 한문시 보다는 토착적인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려 새로운 뜻을 창조, 이를 섬세하고 예술적으로 구사해 우리 국어의 언어미를 한차원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어부사시사’, ‘오우가’의 산실이었던 곳이다.

보길도 세연정, 섬의 최고봉인 격자봉(435m) 밑에 자리하고 있는 이 정자는 지금도 원형 그대로 남아 그 옛날 고산 윤선도의 풍류세월을 짐작케 해주고 있다. 그림·사진/ 박주하 화백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