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61)=장흥 용호정

화이트보스 2009. 1. 16. 16:32




 

 

 

 

 

 

 

 

 

 

 

▲사진(1)=240여년 전 낭주최씨 일가의 효사상(孝思想)이 오롯히 배어있는 장흥 용호정은 가족주의가 파멸돼가는 오늘날 우리의 가슴을 후끈히 달구고 있다.

▲사진(2)=탐진강 굽이돌아 벼랑 끝에 서 있는 용호정, 여름이면 많은 청소년들이 이 정자를 찾아 효사상의 교훈을 배우고 있다

 


-한 정자를 물가 벼랑 위에 세우니/ 어버이 묘소에 성묘 드리고 돌아온다/ 꾀꼬리 해오라기 노랑 흰빛 서로 어울리고/ 버들과 꽃들은 푸르고 붉구나/ 석면(石面)의 이끼에는 사령운(史靈運)의 발자취 머물렀고/ 밝은 달은 엄자능(嚴子陵)의 동강(桐江)에 비쳤도다/정자 난간에 홀로 앉으니 부모 생각 뿐이요/ 엊그제 어린 몸이 백발노인 되었네.-



이 시는 장흥군 부산면 용반리 탐진강 상류 용소(龍沼)의 깎아지른 10여m 벼랑 위에 지어진 용호정(龍湖亭)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 정자는 다른 정자들처럼 사림들이 시문을 논했던 곳도 아니오, 유배 온 선비들의 우국충절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은 더욱 아니다.

용호정은 이 지역 출신의 한 효자가 돌아가신 부모의 은혜를 잊질못해 이곳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묘소를 돌보며 자식된 도리를 다했던‘효 사상’실천의 장소였다.

추석이 며칠 남지 않아서 일까. 용호정을 찾은 길손의 마음은 왠지 울적 했다. 갈수록 가족관계가 파멸로 치닫고 있는 요즘, 이 정자가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는 ‘효 사상(孝 思想)’의 교훈은 한동안 길손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1827년 봄에 지어진 이 정자는 조선시대 호남의 효자로 알려진 우옹(友翁) 최영택(崔榮澤·1759~1838)이 그 주인이다.

우옹은 부친의 죽자 이곳에서 장사를 지내고 3년 동안을 하루 세 번씩 성묘했다. 또 탈복 후에도 하루 한 번씩 찾아와 묘소를 돌보며 자식의 도리를 다하자 이를 지켜본 자식 4형제(두문·형문·규문·경문)가 아버지의 풍우한서(風雨寒暑)를 피해주기 위해 움막을 지어 줬다.

그래서 훗날 이 정자를 망친지정(望親之亭), 위친지정(慰親之亭) 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특히 이 정자는 낭주 최씨 일가의 아름다운 효성(孝誠)을 닮아서인지 주변의 풍광이 빼어나다. 하늘빛을 머금어 파랗게 부서지는 탐진강과 곧게 뻗은 소나무가 조화를 이뤄 얻어진 절경은 그야말로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시키고 있다.

앞서 말했듯 이 정자는 본래 짚으로 엮어진 움막이었다. 그후 후손들이 선친들의‘효 사상(孝思想)을 기리기 위해 1946년에 반듯한 정자로 새로 지어 현재까지 관리해오고 있다.

우옹 최문규의 효성에 대한 기록은‘용호정서(龍湖亭序)’에 잘 나타나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큰 선비 노사 기정진 선생도‘용호정기(龍湖亭記)’을 통해 낭주최씨의 효사상을 예찬하고 있다.

지난 68년 전남도 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된 이 정자는 면적은 약 7평으로 다른 정자보다 규모가 작은 편이다. 평면구성은 강쪽으로 2간을 들이고 안쪽으로는 양쪽으로 반간의 툇마루를 설치, 중앙에 온돌을 두었다. 또한 방 뒷쪽으로도 툇마루를 설치하여 4면을 쉽게 통할 수 있게 했다.

용호정에는 현재 노사 기정진의‘용호정기’를 비롯 용호정 8경을 노래한 8수의 시문 등이 정내에 걸려있다.

-용호정에 오르지 못했어도 이미 경치 좋은 줄 알았는데/ 이제 오르고 보니 가슴 시원하네/ 강물에 비친 달은 연연히 희고/ 산머리 걸친 해는 빨갛게 수놓았네/ 깊숙한 취미 낚시대에 맑은 바람 불고/ 청유(淸遊)는 벽에 걸린 삼척(三尺) 거문고로세/ 이 사이 무궁한 뜻 알고자 하면/ 모름지기 하늘 향해 조화신(造化神)에게 물어보소-

탐진강의 맑은 물처럼 풋풋한 시 한 수가 눈에 들어온다. 효와 장유유서가 무너져 위 아래가 구분없는 세상에서도 묵묵히 버티고 서 있는‘용호정’이 쓸쓸해 보이는 이유는 뭘까. 그림·사진/ 박주하 화백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