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68)=木浦詩社(목포시사)

화이트보스 2009. 1. 16. 16:38

누가 목포를 ‘눈물의 고향’이라 했던가. ‘목포의 눈물’은 그 어느 도시의 것 보다도 아름답다. 목포가 한국 문화예술의 산실로 자리하게 된 것은 아름답도록 빛나는 눈물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금방이라도 짙푸른 파도에 씻겨내려 갈 것만 같은 한반도 남쪽 끝 유달 묏뿌리. 그 기슭에 외롭게 걸려 있는 ‘木浦詩社’가 간간히 찾아오는 길손을 맞고 있다. 이끼 낀 층층 계단을 오르면 목포의 예술을, 아니 전라도의 반골정신과 올곧은 예술로 승화시켰던 근대 문화예술의 요람 답게 현장을 찾는 길손의 마음을 숙연케했다.

‘木浦詩社’의 역사는 1890년 유학자 하정 여규형과 허석재, 박만취 선생이 공동으로 건립했던 유산정(儒山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정자를 중심으로 1920년대 결성 됐던 유산시사(儒山詩社)와 1939년에 결성된 보인시사(輔仁詩社)가 1961년에 ‘木浦詩社’로 통합,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의 ‘木浦詩社’가 있기까지는 ‘유산시사’를 맹렬이 이끌었던 충청도 출신 유학자 초정 김창규(草亭 金昌圭·1863~1935) 선생의 남다른 노력이 있었다. 근대 극작가 김우진의 아버지이기도 한 초정 선생은 ‘유산시사’의 초대부터 3대에 걸쳐 시사장(詩社長)을 역임하면서 인근지역 한학자들과 넓은 교유를 통해 근대 한학 발전에 지대한 공을 남겼다.

초정 선생이 목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전라남도 양무감리(量務監理)와 무안감리(務安監理)겸 무안항 재판소 판사로 재직하면서 이곳으로 이주오면서 부터다.

이재지학(利財之學)에 밝았던 초정 선생이 ‘유산시사’ 운영에 대한 열정의 행적은 ‘목포풍아집’과 ‘유산시사’관련 자료 등에 잘 드러나 있다.

초정 선생의 이러한 선비정신은 무정 정만조(茂亭 鄭萬朝·1858~1936)로 이어져 더욱 꽃을 피웠으며, 1890년부터 오늘날까지 매년 두 차례씩(봄·가을) 백일장을 개최해 한시의 명맥을 이어 온 국내 유일의 시사(詩社)이다.

특히 무정 선생은 남종화의 대가인 의재 허백련과 남농 허건 화백의 호(號)를 내려주었던 당대 호남 최고의 선비로 지역 학자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던 인물이다.

‘木浦詩社’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무정 선생은 조선조 말 명문가의 출신으로 한말의 4대가로 이름을 떨쳤던 추금(秋琴) 강 위(姜瑋)에게서 시문을 익혀 문명을 얻었고, 이건창 황 현 등과 교유했던 한말 지조있는 선비였다.

무정 선생은 1884년에 교섭탕상아문 주사로 관계에 진출, 1889년에 알성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참의와 승지를 지냈다. 그후 1894년 내부참의를 지내다가 1895년 8월 역변(逆變)과 10월 무옥(誣獄)에 관련되어 15년 형을 받고 1896년 4월 진도에 유배되면서 부터 목포와 인연을 맺었다.

그후 무정은 1907년 순종 황제 즉위와 함께 유배가 풀려 서울로 돌아가자 규장각 부제학, 조선사 편수회원, 경성제국대학 강사, 경학원 대제학 등을 지냈던 당대의 한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특히 목포를 상징하는 유달산의 명칭을 ‘鍮達山’에서 ‘儒達山’으로 바꾸게 하고 사람들에게 유학과 시를 가르치면서 개항 이전에 변변한 유학의 교육기관 하나 없었던 목포진에 유학의 기풍을 진작시켜 전통의 맥을 심어주었다.

당시 ‘木浦詩社’는 목포지역의 유림들은 물론 무안, 함평, 나주, 화순, 장성 등 전남지역 한학자들의 사교의 장으로 활성화돼 근대 한시 가단의 요람이 됐다.

‘木浦詩社’의 회원 규모는 1965년에 제작된 ‘목포풍아집’에 260여 회원의 작품이 수록돼 있으며, 회원 명부인 ‘목포음사 사안’에는 무진년(1988년) 추회(秋會)때까지 입사한 회원수가 497명에 달하고 있다.

현재 ‘목포시사’에는 유산정 창건때 쓰여진 ‘유산정 상량문’이 현판으로 걸려있으며, 무정 선생의 영정과 문집‘茂亭存稿’, ‘茂亭存稿補遺’가 보관 돼 있다. 그림·사진/ 서양화가 박주하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