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69)=무안 감리서(務安監理署)

화이트보스 2009. 1. 16. 16:39







 

 

 

 

▲사진(1)=1899년 외국 영사관에 맞서 조선인의 권익보호를 대변했던 무안감리서.

▲사진(2)=현재 무안감리서는 흔적 조차 찾을 길 없고 감나무만이 외롭게 서서 세월의 무상함을 더해주고 있다.



새해 벽두부터 서설(瑞雪)이 펑펑 내리고 있다. 올해는 무엇보다 ‘전라도 정신’이 살아 꿈틀거릴 것 같은 기분좋은 예감이 든다. ‘전라도 반골 정신’, 이 정신은 과연 어디에서 발원 됐을까. 척박한 유배의 땅에서…, 나라잃은 민족의 뼈아픔에서 그 정신은 비롯 됐으리라. 이러한 올곧은 정신은 15세기로 거슬러 올라 사림들의 정자 문화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정자가 아닌 서민들의 생활 속에서 파고들어 민중과 호흡하며 민족의 정체성을 찾았던 것도 종종 눈에 띈다.

그 곳이 바로 무안감리서(務安監理署)이다. 이 곳은 1897년 목포개항과 함께 개항장 내에서의 일본 영사관과의 원활한 외교 및 통상사무를 위해 설치됐다. 감리서의 신설은 1897년 8월에 외부대신이 의정부 의정(議政)에게 감리서 설치를 청원, 같은 해 9월 칙령 제33호로 각개항장감리관제(各開港場監理官濟)를 개칭·반포함으로써 이뤄어졌다.

무안감리 설치후 주된 업무는 개항장의 조계(租界)설치, 외국과의 섭외관계 및 통상관계의 수립, 각국 영사관 분지문제 및 토지의 경매, 고하도·삼학도의 토지문제 등을 취급하였다. 뿐만아니라 외국인들의 갖은 협박과 위협에도 굴하지않고 과감히 이에 대항했던 민족의 자존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일본상인들의 횡포에 대한 조선인 부두노동자들의 노동쟁의 때 일본낭인들이 감리서에 난입하여 갖은 행패를 부렸으나 당시의 6대 김성규씨(극작가 김우진 부친)는 끝까지 조선노동자들 편에 서서 조선인의 이익을 옹호하기도 했다.

1897년 목포개항과 함께 제1대 감리인 진상언(秦尙彦)이 발령장을 받았고 청사는 처음에는 목포진(木浦鎭: 현재 목포시 만호동)을 수리하여 임시청사로 사용하다가, 1906년 10월 제10대 이무영(李무懋榮) 감리를 마지막으로 폐지, 무안부(務安府)로 개편되었다가 1910년 일제에 의해 한일병합이 이루어지면서 폐청되었다.

현재 무안감리서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길이 없다. 다만 옛 사진을 통해서 당시 무안감리서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데, 구전에 따르면 현 신안군청의 내무과와 재무과가 있는 곳에 단층 기와집의 형태로 무안감리서가 위치하였다는 정도이다.

현재 신안군청이 서고(書庫)로 사용하고 있는 석조건물의 일부가 일제시대 건축양식으로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앞서 밝혔듯 무안감리서는 조선의 지방 사무 및 외교사무를 관장했던 관아로 조선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관공서였다는 점에서 높은 의의를 지니고 있다.

또한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역할 만이 강조되던 목포에 행정기관이 설치됨으로써 목포라는 도시가 행정중심의 성격을 갖게되는 계기도 되었다.

무안감리서의 주된 업무는 현전하는 ‘무안보첩’을 통해 간단하나마 살펴 볼 수 있다. ‘무안보첩’은 1987년 부터 1906년까지 무안감리서가 외부와 주고 받은 보고서와 훈령을 모아 놓은 문서로, 박찬승·고석규(목포대 역사문화학부 교수)의 번역을 거쳐 목포문화원에서 국역본으로 발행됐다.

이 문서에는 무안감리서의 설치과정부터 각국 영사관에 대한 대응 양상이 잘 나타나 있다.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옛 선현들의 발자취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손의 어깨 위로 함박눈이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림·사진/ 서양화가 박주하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