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71)=강진 다산초당

화이트보스 2009. 1. 16. 16:41




임오년 새해 벽두부터 세상은 온통 선거 이야기로 뒤숭숭하다. 이러한 세상사를 뒤로하고 조선시대 말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1762~1836)의 체취를 더듬기 위해 여장을 꾸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강진만이 한 눈에 굽어보이는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 마을을 품고 있는 만덕산, 그 기슭에 조선시대 실학사상의 산실인 다산초당이 자리하고 있다.

▲사진(1)=다산 정약용이 18년(1801~1818)의 유배기간 동안 강진에 머물며 ‘목민심서’를 비롯 500여 권의 책을 저술, 실학사상을 펼쳤다. 그의 정신이 밴 초당 옆엔 가뭄에도 마르지않는 약천이 있어 주인의 정신을 말없이 대변해주고 있다.

▲사진(2)=다산이 송방울을 지펴 차를 끓였다는 ‘다조’가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정약용의 다산(茶山)이라는 호는 강진 귤동 뒷산 이름으로, 이 기슭에 다산초당이라는 초가집을 짓고 본격적으로 호로 써왔다.

다산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 6월 16일,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마재)에서 태어났다. 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이다. 아버지 정재원은 지방수령을 역임하다가 1762년(영조 38) 임오사화로 귀양, 그해 정약용을 낳았으며 어머니는 유명한 고산 윤선도의 후손으로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의 손녀이다.

정약용은 1783년 22세때 소과 합격과 1789년 28세로 대과에 합격하여 정조의 사랑을 받아 규장각 초계문신(抄啓文臣), 경기도 암행어사, 황해도 곡산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경세사상을 실천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으나 반대파인 노론벽파(老論僻波)의 미움을 받았다.

1801년 신유사옥(申酉邪獄)의 여파로 정약종, 이승훈, 황사영 등과 함께 숙청을 당하여 겨우 죽음만 모면한 채 경상도 장기에 유배되었다가 곧 강진에 옮겨져 18년 간 귀양생활 중 강진읍 동문밖 주막에서 8년간 머물다 이곳 만덕리 귤동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10년을 머물면서 후진을 가르치고 저술에 전념하였다.

‘목민심서’를 비롯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의 책이 모두 여기서 완성됐다. 그렇기에 다산초당은 조선시대의 실학사상을 낳게한 산실임은 물론 선생의 애국애민사상이 스며있는 곳이기도하다.

당시 다산이 기거했던 집은 오랜 세월에 낡고 쓰러져 지금은 다시 세운 동암, 서암이 다산초당을 중심으로 서 있다.

다산초당의 이웃 백련사 혜장 스님과 교유하면서 차 생활을 시작한 다산은 국산차

예찬자로서 ‘동다기(東茶記)’를 쓰기도 했다. 차를 구걸하는 유명한 걸명소(乞茗疎)도 이때 나왔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로 다신계(多信契)를 제자들과 만들어 다신계 절목(節目)을 만들어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볼 수 없는 독창적인 차문화를 펼쳐나갔다. 그의 차시(茶詩)는 다산이 얼마만큼 차를 사랑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산골물 차가운 소리 대밭에 감싸이고/ 봄 기미는 뜨락의 매화가지에 감도네/ 아름다운 가락이 이 속에 있으련만 달랠 곳 없어/ 여러번 일어나 어정거리다 마네/ 산의 정자엔 쌓아둔 책은 없고/ 오직 이화경과 수경 뿐이라네/ 비가 내린 귤숲은 자못 아름답구나/ 바위 샘물을 손수 떠서 찻병을 씻네/ 약절구질 잦아지니 번거로운 곰팡이는 없건만/ 드물게 달이는 차풍로엔 먼지만 있네.-

현재 다산이 남긴 유적으로는 초당 앞마당에 솔방울을 지펴 차를 끓여 마셨던 다조와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맑은 물이 솟아나는 약천이 있으며, 초당으로 이주 후 바닷가의 돌을 모아 만들었다는 연지석가산과 해배(解配·귀양에서 풀려남)를 앞두고 발자취를 남기는 뜻에서 새긴 정석(丁石)바위가 선명하게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달래주고 있다.

초당 왼편에는 다산이 흑산도로 유배된 둘째형 약전과 가족들을 그리며 마음을 달랬던 천일각이 외롭게 서있다. 천일각 뒷편 오솔길을 따라 1㎞ 지점에는 다산이 자주 들렀던 백련사가 있다.

다산은 1818년 57세로 강진에서 유배를 마치고 고향 마재로 돌아가 1836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지만, 그의 ‘독백서’를 보면 고향에 가서도 다산에서의 추억을 잊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즘처럼 세상이 어지러울 땐 창문을 닫고 차 끓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다스렸던 200여년 전 다산 선생의 음성이 그리워진다. 그림·사진/ 서양화가 박주하 .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