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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백화정
강진 주작산의 주령이 남으로 내려와 팔봉이 형성되어 배산을 이룬 강진군 신전면 용화리 백화마을. 이 마을 초입에는 300여 년이란 인고의 세월을 버텨온 백화정(柏花亭)이란 정자가 있다.
한 촌로(村老)의 안내를 받으며 찾아간 백화정은 보존 상태는 그리 좋지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선비의 기품이 묻어나고 있었다.
▲사진(1)=주작산 주령이 남으로 내려와 팔봉이 형성돼 배산을 이룬 강진군 신전면 용화리 백화마을. 이 마을엔 300여년의 역사를 가진 백화정이 자리하고 있다.
▲사진(2)=백화정 옆에는 수령 200여년 쯤 돼 보이는 늙은 동백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서 있어 정자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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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백화정
“저 동백나무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똑 같애요. 동학란 때와 한일합방 때 잎이 피지않아 죽은 줄로만 알았은데, 두 번씩이나 되살아났지 뭡니까. 그래서 옛부터 동네 어른들은 이 나무를 마을을 지켜주는 신목(神木)으로 섬겨오고 있지요.”
자신을 도강김씨(道康金氏)라고 소개한 촌로는 정자 옆에 서 있는 동백나무를 올려다보며 나무에 얽힌 역사를 설명했다. 200여년도 더나 되었을 법한 늙은 동백나무는 새찬 겨울바람에도 송송이 꽃망울을 맺고 있었다.
또 그 옆으론 200여년 전 정자 관리인 ‘영도’라는 사람의 딸이 심어서 가꾸었다는 유자나무가 한그루가 서 있다. 이처럼 뜰에 있는 동백과 유자나무는 이곳 정자의 연륜을 짐작케해 주고있다.
백화정의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강진군지(康津郡誌)’를 비롯 ‘신전면 마을사’등의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 숙종 때(1675~1719) 건립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후, 이 정자는 도강김씨(道康金氏) 문중이 중심이 돼 신전면 인근지역의 인재들을 불러모아 교육을 했던 강학소(서당) 역할을 수행하면서 강진의 정신문화의 텃밭을 일궜다.
백화정이란 학문의 요람이 자리하고 있음일까. 이 마을 서편으로 조동천이란 개천이 흐르고 있어 수량이 풍부하다. 그래서 농토가 비옥해 예로부터 부촌(富村)으로 알려졌고 교육열 또한 여느 지역보다 별나다.
이와함께 정자를 감싸고 있는 주작산 자락이 부드러워 주민들의 성품이 온화하고 애족경인(愛族敬人)하는 예법(禮法)의 풍속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백화정이 실질적으로 교육기관의 역할 했던 것은 지금으로 부터 300여년 전. 그 뿌리는 도강김씨로 강진군 신전면 입향조(入鄕祖)가 되는 김상정(金尙精·1591~1665,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역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김상정이 백화 마을에 터를 잡은 이후, 도강김씨가 자작일촌을 이루고 백화정을 중심으로 경서를 비롯 서예, 그림, 등 다양한 학문과 소양을 교육하는 기관으로 활용해왔다.
특히 백화정은 개화기에 이르러서는 신학문과 조선어를 교육, 그리고 시국이 어지러울때는 야학소를 설치해 지역민들의 문맹 퇴치에 일조를 해왔다. 백화정에서의 야학 활동은 1954년까지 이어졌고, 이것이 바탕이돼 오늘날 강진의 정신문화를 낳게한 원동력이 됐다.
백화정의 뒷편에는 영사정(永思亭)이란 또 하나의 정자가 있는데, 이 건물은 도강김씨 일가(一家)가 선영을 제사히기 위해 1916년 세운 건물이다. 이들은 매년 가풍(家風)을 잇는 제례를 지내고 있어 가족주의가 파괴돼 가는 요즘, 세인들에게 많은 교훈을 안겨주고 있다. 그림·사진/ 서양화가 박주하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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