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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이 참으로 시끌벅적하다. 정치판이 그렇고, 가족주의의 붕괴 등이 그것들이다. 특히 인간성 마저 정보화 물결에 편승돼 언제 부터인가 사람 냄새를 맡아 볼 수 없다.
시절이 이쯤되자 인간들이 가장 소중하게 간직해야할 성(性)의 개념이 어김없이 무너지고 성을 상품화하는 웃지못할 사회 현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사진(1)=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연지(蓮池) 안에는 조그마한 섬이 있다. 그 섬안에 수령을 알 수 없은 노송 두그루가 외롭게 서있는 백련당을 지키고 있다.
▲사진(2)=백련당의 역사는 100여년에 불과하지만 500여년 전 정유재란때 정조를 목숨과 바꿨던 두 자매의 열행(烈行)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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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군 성전면 금당리 초입에 자리하고 있는 백련당, 이 곳은 명칭 그대로 새하얀 백련의 자태가 정자에 묻어있는 듯 했다.
이 정자는 1930년 원주이씨(原州李氏) 일가(一家)가 건립했다. 건립시기는 고작 70여년 밖에 되진 않지만 정자에 얽힌 열행(烈行)은 5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이야기를 이 마을 이장 이상연씨는 이렇게 전한다.
원주이씨 이기복(1540~?)에게 세명의 딸이 있었다. 이 가운데 큰 딸은 창령조씨 조장일, 셋째딸은 청주한씨 한득종에게 각각 출가했다. 정유재란(1597)이 일어나자 두 자매는 친정에 와 있던 중 전란중이긴 하나 굶고 살 수는 없어 들에 나가 벼를 베려다가 왜군을 만나 겁탈의 위기에 처했다. 이에 먼저 언니가 들고 있는 낫으로 왜군을 향해 반항하다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어 동생도 언니의 뒤를 따르고 말았다.
이러한 열행(烈行)사실이 알려져 1613년(광해군 5)에 조정에서 자매의 지조를 높이 사 이곳 금당리에 정려를 세우도록 지시했다.
그후 큰 딸의 정려는 조장일의 후손들이 장흥 안양면 운흥리로 옮겨갔고, 세째는 한득종에게 후손이 없어 정려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퇴락돼 현재는 전하지않고 있다.
훗날 원주이씨 후손들이 조상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백련당을 세우고 그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백련당은 다른 정자와는 달리 작은 못 안에 놓여있다. 이름하여 연지(蓮池)이다.
백련당과 함께 연지는 가슴 아린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원주이씨가 이남(李楠·1505~1555)이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았을때, 같은 집안의 재종손(再從孫) 이의신(李懿信)은 풍수에 밝았다.
하루는 이남의 노비가 이의신 집에 들렀다가 모자간의 대화하는 것을 몰래 들으니 “집터 아에 연모을 파야 가문이 번성하게 되며 집터에 있는 초목이 변하게 되면 지비을 일시 비워주어야 화를 면하게 된다”고 했다. 이에 노비가 집으로 돌아가 주인에게 이를 알리자 이남은 곳 연못을 파고(현재의 방죽) 홍련을 심었으며, 그뒤 원주이씨 가문이 번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특히 연방죽 안에는 두개의 조그만 섬이 잇는데 이 섬에는 수령미상의 노송이 두그루가 자리하고 있어 백련당을 지키고 있다.
백련당과 연지, 조선의 두 여인의 한이 해하얀 백련으로 피어났을까. 500여년 전의 홍련은 세월에 닳고 닳아 하연색으로 퇴색(?)돼 가끔씩 이곳을 찾은 길손들에게 열행(烈行)의 참의미를 안겨주고 있다.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그림·사진/ 서양화가 박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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