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는 물 베고 사람은 소리 베고/ 물소리 졸졸 그 무엇을 원망하듯/ 시국이 어지러워 나라가 걱정되고/ 섬 도둑 침범할 제 성을 지켰네/ 장한 뜻은 의에 죽음 맹세 하였고/ 분한 마음 어찌 참고 원수와 함께 살리/ 온 가족의 바다 넋 그 원한 그지없고/ 여섯 식구 한 배 탈 제 그 뜻 무거워라/ 정자 꾸밈 세로우니 선열 더욱 빛이나고/ 옮겨지니 자손 정성 여기서 보겠구려/ 이 정자에 오르는 이 허술하게 보지마소/ 충혼이 엉켰으니 유명한 정자라네.<침류정>
‘적국의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가족과 함께 목숨을 끊어 조선 선비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사내 대장부가 아니겠는가.’
조선 말 한 선비의 기개와 충절이 서려있는 영광군 불갑면 녹산리 인산 마을에 자리한 침류정(枕流亭)을 찾아 무작정 길을 나섰다.
내리쬐는 삼월의 햇볕은 도로변에 신나게 흐드러진 봄꽃들과 어우러져 봄의 분위기를 한껏 자아냈다. 완연한 봄 기운을 느끼는 계절이라지만, 조선 선비의 한(恨)이 서려있는 ‘침류정’을 찾는다는 것에 다소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하지만 어쩌랴, 속절 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거슬러 오르는 길손은 차창을 가르는 봄 바람이 마냥 싱그럽기만 했다. 광주에서 1시간여 달렸을까. 영광군 불갑면 녹산리 인산마을 입구에 이르자 정자 한 채가 길손을 맞았다.
‘침류정(枕流亭)’, 이 정자의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본래 주인은 조선 선조 때의 사람 침류정(枕流亭) 유익겸(柳益謙)과 그의 아들인 계정(溪亭) 유 오(柳澳)로 전해지고 있다. 이들 부자(父子)의 애국 충절을 기리기 위해 훗날 고흥유씨(高興柳氏) 후손들이 이 곳에 정자를 짓고 선조의 충절을 계승해오고 있다.
이들 부자에 대한 기록은 지극히 미미한 실정이다. 단지 ‘침류정 중건기’에서만이 그들의 행적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침류정 중건기에 따르면, 유익겸은 유년 시절부터 강건한 선비 정신과 기개가 있는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책을 덮고 지역 청년들을 끌어 모아 성(城)을 지키는데 많은 공을 세워 오늘날 ‘영광의 정신문화’를 낳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특히 유익겸 선생과 그의 아들인 유 오의 인물 됨됨이는 정유재란 때의 행적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유씨 부자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역 사림들과 구국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때 가족들의 신변에 위협을 느끼자 일단 안전을 위해 칠산바다를 건너 피난길에 올랐다. 그러나 항해 도중 왜군을 만나자 ‘내가 본시 나라를 위해 한번 죽지 못함이 한 스러워했는데, 이제야 그 뜻을 이루게 됐다’며 여섯 명의 가족과 함께 바다에 투신, 죽음으로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이러한 유씨 부자의 충절 소식이 전해지자 영광지역 선비들 뿐 만 아니라, 인근 지역으로까지 알려져 흔들리는 국운(國運)의 비통함에 결속력을 다지게 한 원동력을 제공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푸른 물 속에 뛰어들어 죽음으로써 나라의 어지러움을 통탄했던 유익겸과 그의 아들 오. 그들의 숭고한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풍전등화 앞에 처한 나라에 힘을 보태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림·사진/ 한국화가 장복수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