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78)=영광 선양정

화이트보스 2009. 1. 16. 16:56


▲영광 선양정
‘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제아무리 예쁘고 좋은 꽃이라 할지라도 10일을 가지 못함을 이르는 말이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도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자연의 섭리 속에 묻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끔, 아주 가끔씩 자연의 순리를 역행(?)이라도 하듯 수 백년을 내려오면서 세상 사람들의 가슴을 적시는‘큰 바위 얼굴’이 있다.
향기는 꽃에게서만 있는 게 아니다. 한 평생을 어질고 정의롭게 살다간 사람에겐 꽃 향기보다 더 진한 내음이 우리들의 가슴에 강물져 흐른다.
400여 년 전 풍전등화 앞에 놓여있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한 장부의 우국충정이 서려있는 영광군 불갑면 부춘리 가오 마을을 찾았다.
마을 입구엔 아름드리한 당산나무가 버티고 있고, 그 옆으로 ‘선양정(善養亭)’이란 정자 한 채가 다소곳이 길손을 맞았다.
이 정자의 주인은 조선중기 때의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정희맹(丁希孟·1536~1596)이다. 정희맹은 영광 불갑면 생원 순(珣)과 어머니 광산김씨(光山金氏)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고산(孤山)·선양정(善養亭)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바르고 총명해 지역 선비들로부터‘신동’이란 말을 들으며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낸 정희맹은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가만 있을 리 없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대장부의 도리는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것이 기본’이라며 아들 경(鏡)과 건(鍵)을 근왕병(勤王兵)으로 보내고, 자신도 지역 청년 50여 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향을 지켰다.
이때 정희맹은 영광이 곡창 지대임을 감안, 많은 군량미를 모아 광주의 고경명과 영남의 곽재우에게 조달하는 한편 심지어는 가산(家産)까지 털어 의병활동을 펼쳤다.
그의 이러한 의행(義行)은 인근 지역으로까지 확산돼 영광지역 의병 활동에 불씨를 당기는 계기가 됐다. 특히 그는 의병활동 뿐 만 아니라 조선 명종 때의 영광출신 대학자 강 항(姜沆·1567~1618)과 두터운 친교를 갖고 경전에 전념해 훗날 ‘선양정집(善養亭集)’4권 2책을 남겼다. 정희맹은 비록 강 항과 31년이라는 나이 차이가 있음에도 동향(同鄕)이란 이유도 있었겠지만, 추구하는 사상의 일치로 친분이 남달라 지역 선비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400여년 전 정희맹의 우국충정을 담고 있는 선양정. 세월의 흐름으로 정자의 옛 모습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지만, 정내(亭內)에 걸려있는 여러 개의 현판들에서 그의 체취를 느낄 수가 있다.
의인(義人)들은 떠나고 잡초만 무성하게 우거진 요즘 세상, 정희맹의 400여 년전 의로운 행동은 오늘 우리들의 가슴 속에 잔잔한 물결로 일렁이고있다.그림·사진// 한국화가 장복수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