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80)=영암 회사정

화이트보스 2009. 1. 16. 16:57


 

▲영암 회사정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 민주주의의 불씨를 다둑여왔던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에 자리한 회사정(會社亭). 1646년에 건립된 회사정은 여느 정자와는 달리 그 의미가 남다르다. 대부분의 정자가 유배자들이나 선비들의 수학 장소로 건립 됐다면, 이 정자는 향촌 질서를 바로잡는 대동계의 집합소로 이용된 점이 특이하다.

▲영암 회사정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 민주주의의 불씨를 다둑여왔던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에 자리한 회사정(會社亭). 1646년에 건립된 회사정은 여느 정자와는 달리 그 의미가 남다르다. 대부분의 정자가 유배자들이나 선비들의 수학 장소로 건립 됐다면, 이 정자는 향촌 질서를 바로잡는 대동계의 집합소로 이용된 점이 특이하다.
회사정은 영암 뿐만 아니라 호남에서도 대표 될만한 웅대한 정자로서, 구림대동계 (鳩林大同契)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정자에 걸렸던 편액들은 모두 불타 없어졌으나 그 글들은 ‘회사정 제영’(會社亭諸詠)이란 책으로 남아 현존하고 있다. 회사정의 건립 배경이 된 구림 대동계는 1565년(명종 20)경 박규정(朴奎精), 임 호(林浩) 등에 의하여 창설된 이래 현재까지도 면면히 지속되는 호남의 대표적 동약으로써 이 회사정은 그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 회사정은 구림 대동계의 강회, 집회소로서만이 아니라, 외래의 귀빈과 관행(官行)의 영접, 경축일이나 국상시에 행사장소로 이용되었다.
1565년 창설된 구림 대동계는 이 보다 150여년 전에 이미 동계의 선행형태로 존재 했었다. 그것은 난포 박씨 박 빈(朴彬)의 구림 입향 이후 그 내·외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것으로, 그 뒤 박 권(朴權)·임구령(林九齡)·임 혼(林渾) 등에 의해 향약의 선행 형태로 유지되어 왔었다.
구림 대동계는 촌락민을 중심한 공동체조직으로 존재했다. 그 공동체 조직은 이사(里社)와 같은 조직이 발전된 형태였다.
구림의 동계 조직은 전통적인 촌락조직을 기반으로 하면서 성립되었다. 그 주도층은 사족적 기반, 동족적 기반을 매개로 주도권을 확보 하였으며 왜란을 거치면서 기존의 사족 지배체제가 와해의 국면을 맞게 되자 이를 재확립하려는 노력으로서 1609∼1613년의 상·하 합계 형태로의 중수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인조 19년(1641)에서 1646년에 걸쳐 재중수 작업이 진행되었다.
1646년에 완비된 동계의 성격은 17세기 사족의 입장과 향촌 지배질서를 반영하는 자료로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선 이는 1609∼1613년의 중수와 비교하여 약조면에서 새롭게 교량이나 도로의 보수, 그리고 산림보호 등의 동리와 관련된 사업에 대한 조목이 추가되고 동사(洞事)에 태만한 사람을 ‘출계’(黜契)가 아닌 ‘출동’(黜洞)으로 벌하는 조항이 마련되기도 했다.
이는 당시의 동계조직이 촌락공동체적 기능에 일편 주력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만한 것으로, 상·하합계 형태의 17세기 동계가 지닌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촌락공동체적인 성격은 오히려 17세기말 18세기초에 이르면서 사족적 지배가 달성되자 일시 퇴화의 국면을 보여주며, 하계원의 탈락도 두드러진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 구림의 동계는 이후 조직적인 결속을 한말까지 유지하여 오랜 전통을 인정받고 있으나, 사실 내용상으로 보면 동계의 파치나 기층세력의 반발 등을 적절하게 수용하면서 그 권위를 존속한 때문에, 촌락내부의 다양한 변화상이 은폐되고 있다.
현전하는 구림대동계의 전형은 1646년에 중수된 동계로, 이 중수작업 이후는 기본적인 동계 골격과 주도층이 크게 변화되지 않고 조선말기까지 유지되었다.
호남 민주주의의 요람이 됐던 회사정.
이 정자는 3·1운동 당시는 독립만세의 기치를 올렸던 장소로, 국난에 처했을 때는 머리를 맞대고 나라를 걱정했던 장소로,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다수결 투표 등 민주적인 원칙으로 500여 년의 전통을 이어온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살아숨쉬고 있다.

글/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그림·사진/ 한국화가 장복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