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조선 청백리 유관 선생 애민사상 깊게 서려
▲ =이 이·고경명·유상운 등 시문 지어 德 칭송
▲ =600여년전 강학·향약집합소로 민족정신 고양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사람으로 태어나 욕심을 버리고 흐르는 계곡 물처럼 맑고 깨끗이 사는 것이다. 조선시대 청백리로 명망이 높은 하정 유 관 선생(夏亭 柳寬·1346~1433)의 넋이 꽃으로 피었을까.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의 들녘엔 하얀 개망초가 지천으로 흐드러져 있다.
들길을 지나 마을 앞에 이르면 하정 선생의 발자취가 새겨진 정자 한 채를 만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영팔정(詠八亭)이다.
이 정자는 조선 초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한 하정 선생이 이 곳 사람들의 유순한 성품과 경치에 감흥, 그의 아들 맹문孟聞)을 시켜 1406년(태종 6)에 지은 것으로 훗날 지역 영재들의 교육장소였던 강학소와 향약 집합소로 사용돼 민족정신을 고양한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하정 선생은 일찍이 조선 개국공신으로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태조실록’을 편찬하는데 한 몫을 담당했던 대선비였다. 그후 1424년(세종 6)에 ‘고려사’를 찬진(撰進)하였고, 백옥같은 선정(善政)으로 청백리라는 칭호를 받은 큰 인물이었다.
그의 이러한 행장은 영팔정에 걸린 여러 현판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1433년 하정이 세상을 떠난 뒤 율곡 이이(栗谷 李珥·1536~1584)는 이곳에 들러 하정 선생의 학덕을 기리면서 주변경관을 팔경시(八景詩)로 읊었고, 고경명(高敬命)·남이공(南以恭)·유상운(柳尙運) 등이 정자 주인의 덕을 기리는 시문을 남기기도 했다.
당시 이 정자의 이름은 마을 이름인 ‘모산(茅山)’의 ‘모(茅)’자와 ‘하정(夏亭)’의 ‘정(亭)’자를 딴 ‘모정(茅亭)’으로 불리었다. 그후 이 이·고경명·남이공·유상운 등의 선비들이 잇따라 남긴‘팔경시’로 인해 훗날 ‘영팔정(詠八亭)’으로 개명하기에 이른다. 이 정자는 숙종 15년(1689)에 영의정을 지낸 유상운이 건물을 고친 것 외에는 수리한 내력에 대해서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영팔정의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내부는 방이나 벽체없이 사방이 개방된 정사각형 평면이며, 마루는 우물마루이고 오른쪽에만 난간을 설치하였다.
한편 영팔정과 직접 관련된 유물로는 정자 내부에 걸린 제영(題詠)을 비롯 기문현판(記文懸版)과 동계책기(洞契冊記), 상량문과 주련(柱聯) 4개가 있으며, ‘영팔정’현판은 조선 명필 남구만(南九萬, 1629~1711) 선생의 글씨이다.
특히 이 정자는 조선초기에 건립된 이후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지역의 인재 배출은 물론 사정(社亭)으로써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으며, 지역 영재들의 강학소, 향약의 집합소로 활용돼 민족 정기의 맥을 잇는 기반이 돼 왔다.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그림·사진/ 한국화가 장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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