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83)=영암 이우당

화이트보스 2009. 1. 16. 17:17

 

 

조선 문신 신희남, 한석봉 제자 삼아 서예 강론

 

▲ =이이·하서·옥봉 등 큰선비들과 교유 政事 논해

▲ =청렴결백 상징‘竹’‘蓮’일컬어‘二友堂’명명

조선의 명필 한석봉의 신필(神筆)에 대해서는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리라. 그러나 그를 ‘조선의 명필’로 키워놓은 스승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이가 드물다. 스승보다 더 나은 제자를 일컬어 청출어람이라 했을까.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에 자리한 이우당(二友堂), 이 아담한 정자는 한석봉이 수학했던 장소로도 유명하지만 정자의 주인인 조선의 문신 영계 신희남 선생(溪溪 愼喜男·1523~1597)의 인품을 오롯이 묻고있어 신비감마저 감돌고 있다.

1474년 건립된 이우당은 조선명종~선조대의 명신이었던 영계 선생이 거처했던 정자이다. 영계 선생은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이 정자에서 거처하면서 한석봉을 제자로 맞아들였으며, 이율곡, 김하서, 박사암, 이청연, 백옥봉, 심희수, 임억령 등 이름난 학자들이 학문과 정사를 논하며 시를 읊었다.
또 신희남의 증손자인 신천익(愼天翊)·해익(海翊) 형제가 이우당에서 태어났는데, 형인 천익은 광해군 때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낙향해 송시열, 이경흥, 원두표, 장 유, 이후원, 김수항, 남구만, 이 식 등과 교유했다.
여기서 영계 선생의 행장을 들여다 보자. 거창신씨 후손으로 태어난 영계 선생은 조선의 문신으로서 자는 길원(吉遠), 호는 영계(溪溪), 관찰사 기(幾)의 현손(玄孫)이다.
영계 선생은 어려서부터 시(詩)와 글씨에 뛰어나 1543년(중종38) 진사(進士)가 되고, 1555년(명종1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70년(선조 3)에 수찬(修撰)을 거쳐 장령(掌令)·사간(司諫)을 좌승지(左承旨)·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576년(선조 9) 병조 참의(兵曹參議)가 됐다.
1581년에 성절사(聖節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가지 못했다. 그 후 동인(東人)·서인(西人)의 당쟁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자연을 벗하며 후학양성의 즐거움으로 여생을 보냈다.
조선의 명필 한석봉이 영계 선생을 만난 것은 석봉의 나이 12살 때의 일이다.
1543년 송도(개성)에서 태어난 석봉은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떡 장사를 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매우 가난하게 자랐다. 5세 때부터 할아버지에게서 천자문과 글씨를 배우기 시작하여 8세 때에는 서당을 다녔고 12세 때 신희남의 제자가 되어 1557년 서도 경연대회에서 장원을 차지, 훗날 명나라에까지 필명이 떨쳤던 서예의 대가가 됐다.
석봉의 서예는 단지 그의 재질 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석봉 옆에는 영계 선생 같은 큰 스승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명필 한석봉의 배출과 조선 큰 선비들의 사랑방이 됐던 이우당.
‘이우당(二友堂)’의 명명은 다른 정자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정감을 주고 있다. 영계 선생의 선친으로 1474년(성종 5) 좌승지를 지냈던 신영명(愼榮命)의 충절의 상징인 대나무와 청렴결백의 상징인 연꽃을 가리켜 ‘이우당’으로 이름했다. 지금도 대문 밖 조그만 연못에는 대나무와 연꽃이 있어 그 연원을 짐작케 하고있다.
이우당의 규모는 정면 5칸·측면 1칸 반 맞배지붕으로 좌측 1칸, 우측 2칸은 재실, 가운데 2칸은 대청이다. 이우당의 앞에는 거창신씨 문중 사우인 송양사(松陽祠)가 자리하고 있다. 이우당은 현재 거창신씨의 문각(門閣)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림·사진/ 한국화가 장복수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