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광주정신 찾는 정자기행

호남정신의 뿌리찾는 정자기행(85)=여수 충민사

화이트보스 2009. 1. 16. 17:20


 

언제였던가. 초등학생들에게 장차 꿈을 물으면 10명 중 7~8명은 ‘이순신 장군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대답했던 아련한 시절이 있었다. 그만큼 이충무공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살아있는 신화같은 존재였다. 그 신화를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충민사’를 찾아 여수로 내달렸다.

 

 

 


 

 

 

 

 

 

 

 

 

 

▲ =400여년 전 이충무공 구국충정 고이 간직

1601년 왕명 받아 건립 현충사에 103년 앞서

거듭된 서원철폐령 몸살 불구 옛모습 그대로

언제였던가. 초등학생들에게 장차 꿈을 물으면 10명 중 7~8명은 ‘이순신 장군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대답했던 아련한 시절이 있었다. 그만큼 이충무공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살아있는 신화같은 존재였다. 그 신화를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충민사’를 찾아 여수로 내달렸다.

여수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국도 17호선을 따라 시내 방향으로 100m쯤 가면 두 갈레 길을 만난다. 이 곳 사람들은 이 길을 ‘윗길’과 ‘아랫길’이라 부르고 있다.

충민사는 윗길(좌측길)로 약 1.5㎞쯤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충민사 우측으로는 ‘석천사’가 있고 조금만 더 우측으로 가면 ‘하마비’를 만날 수 있다.

‘하마비’란 그 곳을 지나는 사람이 아무리 지체가 높다 하여도 말에서 내려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충무공의 구국충정을 묻고있는 충민사는 그 만큼 예부터 신성시 돼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충민사(忠愍祠)는 임진왜란 당시 해전을 승리로 이끈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주향으로 하고 의민공 이억기, 좌찬성 안홍국을 배향하고 있는 사당이다. 이처럼 사(祠)는 정자(亭子)와는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그렇지만 우국충정과 사상 만큼은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 사우의 주인격인 이순신 장군(1545~1598)의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이다. 선조 9년(1576)에 무과에 급제한 후 조산만호, 정읍현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다. 그가 수군절도사로 있을 때 장차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거북선을 만드는 등 만반의 대비를 하였음은 너무도 유명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 당포, 한산도, 부산포 해전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여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선조 31년(1598) 도망가는 왜적을 노량에서 섬멸하던 중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또 이충무공과 함께 배향된 이억기 장군(1561~1597)은 자는 경수요, 시호는 의민이다. 장군은 17세때 무과에 급제한 후 경흥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는 전라우도 수사가 되어 이순신 장군과 연합하여 여러 해전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때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이와함께 좌찬성 안홍국 장군(?~1597)은 자는 선경이요, 시호는 충현으로 선조 16년(1583)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막료로 있으면서 여러 해전에서 커다란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 해전에서 적의 유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이 사우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선조 34년(1601)에 세 장군의 구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조선 선조 34년(1601) 영의정 오성 부원군 백사 이항복의 계청을 받아 왕명으로 통제사 이시언이 건립한 충무공의 사당으로 국내 최초 최고의 것이다.

충민사는 지난 1993년 6월 국가사적 제381호로 지정된 사당으로 아산 현충사 보다 103년전에 지은 충무공 사액사당 제1호다.

고종 5년(1868년)에 내려진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다가 고종 10년(1873년)에 다시 세워졌으나 919년 일제의 탄압으로 다시 철폐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이 충무공의 뜨거운 조국애가 물씬 스며있는 충민사를 뒤로하고 충의문을 내려오는 돌계단 위로 초여름을 재촉하는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400여년 전 장군의 구국충정이 꽃으로 환생 했을까. 충의문 양 옆으로는 철 맞난 치자꽃이 하얗게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그림·사진/ 한국화가 장복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