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젊은 水軍 초롱한 눈빛 눈 앞에 아른
▲ =임란 당시 전라좌수영 해안 경비 초소 역할
예로부터 여수를 가리켜 ‘호국의 성지’라 일컬어지고 있다. 이 곳은 임진왜란 당시 해전(海戰)에서 용맹을 떨쳤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혼이 곳곳에 서려있어 어디를 가나 충무공의 애국 정신과 그 체취를 확인 할 수 있다.
여수시 군자동 472번지에 자리하고 있는 ‘망해루(望海樓), 국보 제304호로 지정된 진남관과 함께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는 이 망해루는 여타 정자들이 문신이나 지역 사림의 학문과 시문을 읊었던 장소로 활용 됐다면, 이 정자는 수군에 의해 건립돼 적의 해안 침략을 감시했던 초소 역할을 했다.
여수시 군자동 472번지에 자리하고 있는 ‘망해루(望海樓), 국보 제304호로 지정된 진남관과 함께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는 이 망해루는 여타 정자들이 문신이나 지역 사림의 학문과 시문을 읊었던 장소로 활용 됐다면, 이 정자는 수군에 의해 건립돼 적의 해안 침략을 감시했던 초소 역할을 했다.
망해루의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1903년 께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진남관 전경 사진과 고문헌 ‘구읍지’·‘승평지’·‘동국여지승람’등을 뒤적여 보면 1599년(선조 32) 삼도통제사 이시언 장군이 좌수영 복원시 진남관과 함께 건립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또 이들 기록으로 보면 망해루는 1664년(현종 5) 이도빈 수사 때 개축됐으며, 그후 1895년(고종 32)는 좌수영이 폐영된 후 1900년을 전후해 철거 된 것을 1991년 4월 여수시가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남관 입구에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는 망해루는 지금은 높은 건물들로 인해 여수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지 않지만, 임진왜란 당시 이 정자에 올라서면 시야가 탁 트여 인근 바다가 훤히 들어와 왜적들의 침입을 감시 하기에 매우 적합했던 장소였다.
여기서 망해루와 역사를 같이하고 있는 진남관에 대해 살펴 보고 넘어가자. 국보 304호인 진남관은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전라좌수영의 유일한 건축물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해인 1599년 이충무공의 후임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시언이 정유재란으로 불타 버린 진해루(鎭海樓)터에 세운 75칸의 대규모 객사(客舍)이다. 남쪽을 진무한다는 의미에서 ‘鎭南館’ 이라 이름했는데, ‘난중 일기’에는 진해루에서 공무를 보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후 1664년 절도사 이도빈이 크고 작은 수리를 거쳤으나 1716년 절도사 이여옥 때 대화재로 소실된 것을 1718년 이제면 수사가 다시 중창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르는 건물의 뼈대이다.
특히 진남관은 순종 5년(1911) 여수공립보통학교를 시작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여수중학교와 야간상업학교로 사용돼 오다가 해방 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으며 1953년 진남관 보수 공사 도중 1718년 이제면 수사가 쓴 현판이 발견되기도 했다.
현 건물은 정면 15칸(54.5m), 측면 5칸(14m), 면적이 240평의 대형 건물로 해인사 장경판고와 함께 몇 안되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 건물로 팔작지붕을 올린 겹처마 단층 건물이다. 이와함께 장방형 대지에 2열 바른층 쌓기를 하고 있는 진남관은 기단 가장자리를 장대석으로 돌리고 큰 막돌 덤벙 초석 위에 민흘림의 원형 기둥(68개)을 세워 독특한 양식을 하고있다.
한편 진남관은 1957년 5월 보물 32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4월 그 중요성과 가치가 인정돼 국보 제304호로 지정됐다.
400여년 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망해루와 진남관, 이끼 낀 돌계단 틈새를 비집고 올라온 이름모를 풀꽃에서 문득, 달빛 젖은 이슬을 맞으며 조국의 해안을 지켰을 조선의 한 젊은 수군(水軍)의 모습이 투영되는 듯 했다.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그림·사진/ 한국화가 장복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