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촌 최덕지 사상 받들어 ‘구국의 정신’배양
▲ =성삼문·이 치·유성원 등 시문 지어 덕 칭송
▲ =‘동계자료’8책 조선후기 향촌 생활사‘생생’
석양의 하늘은 참으로 아름답다. 마치 오색 물감을 뿌려놓은 듯 채색돼 가는 한 폭의 수채화처럼 …. 그래서 곱게 늙어가는 사람을 가리켜 곧잘 황혼에 비유하곤 한다.
지금으로 부터 550여년 전,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조선초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고고하게 생을 마감했던 연촌 최덕지(烟村 崔德之·1384~1455) 선생이다.
문인으로서, 학자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연촌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내동마을로 내달렸다. 성하(盛夏)의 신록을 가르며 얼마나 달렸을까. 내동마을 초입에 들어서자 아름드리한 소나무와 함께 자리한 영보정(永保亭)이 길손을 맞았다.
정자 옆으로 분재를 연상케하는 소나무 한 그루가 자유분방하게 구부러진 채 뿌리 내리고 있었다. 눈 짐작으로 보아 500여년의 세월은 족히 넘었을 듯 하다.
영보정은 연촌 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 이곳으로 내려와 만년을 보낼 무렵, 후학들의 강학을 위해 그의 사위 신천익(愼天翊·1592~1661)과 함께 건립한 정자이다. 정자의 건립 연대는 확실히 전해지지 않으나 두 사람의 생몰연대로 보아 1630년께로 추정된다.
1630년대 현재의 규모로 완성된 이 정자는 그후 부분적인 중·개수를 거쳐 한말까지 유지됐고 일제시대에는 이 곳에 영보학원(1921년)을 설립, 청소년들에게 항일 구국정신을 배양하기도 했다.
특히 영암 청년 등의 항일투쟁으로 손꼽히는 1931년의 형제봉(兄第峰) 만세운동도 사실은 이 영보학원에서 배출된 졸업생들이 중심이 됐다.
이처럼 영보정은 신교육과 구국정신을 함양한 학사(學舍)로써 이 지방민들에게 의미가 큰 유적으로, 현재도 마을 사람들의 구심체로써 매년 5월 5일에 풍향찰(豊鄕察)이라는 마을축제가 이 정자에서 열리고 있다.
정자의 주인인 연촌 선생은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주군(州郡)을 다스리고 남원부사를 역임한 뒤 이곳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향민을 교화하는 등 지역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했다.
특히 1450년(문종 원년)에 예문관직제학이 되었으나 이듬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양성에 힘을 쏟으며 선비의 도리를 실천했다. 이때 문종은 영정(影幀)과 유지원본(油紙草木·보물 제594호)을 하사했고 동료 문인이었던 성삼문·이 치·유성원 등은 시문을 지어 덕을 칭송했다 하니, 그의 인품이 얼마만큼 고매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영보정과 관련된 유물·유적으로는 전주최씨와 거창신씨 문족이 중심이 되어 창설된 ‘영보정 동계자료’ 8책이 전해오고 있는데, 이들 자료들은 조선후기 양암지방 향촌사회의 생생한 생활사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전면이 약 1.5m 높이로 석축 되어진 묘좌유향(卯坐酉向)으로 자리하고 있는 이 정자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건물로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네 귀에는 활주를 세웠고 중앙의 3칸, 뒤쪽으로 측면 1칸에는 마루방을 꾸미고 있다.
550여년 전에 살았던 연촌 선생의 체취를 오롯히 묻어있는 영보정. 정자 지붕 위로 어느덧 초여름의 석양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그림·사진/ 한국화가 장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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