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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노사 기정진과 성제 기삼연의 학통을 이어온 성와 이승달 선생의 정신이 오롯하게 배어있는 덕림정사.
▲사진(2)=한일합방 이후 성와 선생은 나라잃은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이 곳 산중에 은둔, 초막을 짓고 지역 영재들을 모아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덕림정사를 지키고 있는 팔덕문은 그의 올곧았던 선비사상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지난 99년 5월부터 3년여 동안 본 시리즈의 그림을 맡아 수고해주신 박주하 화백께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합니다. 이번회 부터는 한국화가 장복수씨가 함께합니다. 장 화백은 조선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시·도전 추천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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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덕림정사
사람냄새가 미치도록 그리운 봄빛 따사로운 수요일 오후, 조선 말 어지러운 난세를 뒤로하고 깊은 산골로 들어가 망국의 한(恨)을 달랬던 한 선비의 발자취를 찾아떠났다.
광주에서 승용차로 내리 얼마나 달렸을까. 굴비의 집산지 영광 법성포 칠산 앞바다를 지나 홍농읍으로 이어지는 지방도는 제법 봄기운이 완연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영광 출신 선비 성와(醒窩) 이승달(李承達·1875~1952)의 도학사상과 민족정신이 뿌리 깊게 박혀있는 영광군 홍농읍 월암리 풍암마을에 자리한 덕림정사(德林精舍), 이 정사를 오르는 길목엔 이름모를 풀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길손을 맞았다.
지조 높은 선비의 정신을 묻고 있음일까. 덕림정사의 ‘입덕문(入德門)’을 들어가는 길손의 마음은 숙연함 그 자체였다.
입덕문 오른편으로는 장정의 키 보다 더 큰 대리석에 ‘덕필유린 도불추지(德必有隣 道不墜地·덕은 반드시 이웃에 있고, 도리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문구는 훗날 성와 선생의 아들 학용씨(86·한학자)가 아버지인 성와 선생의 도학사상을 받들어 덕림정사 앞에 세워 놓은 것이다.
이곳 덕림정사는 호남의 거유(巨儒)이자 위정척사사상의 태두인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188~1879)의 학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성와 선생은 노사 기정진의 제자인 성제(省濟) 기삼연(寄參衍·1851~1908)선생의 직계 제자로서, 평생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를 도와 도학사상의 맥을 이어 온 인물이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발생하고 단발령이 강행되어 각지에서 의병 봉기가 일어나자, 성와의 스승인 성제 기삼연(省濟 寄參衍·1851~1908)은 지역 선비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성와 선생은 스승의 뒤를 따르며 영광지역 선비들과 함께 봉기에 참여했다.
성제 선생은 러·일전쟁 직후 ‘을사조약’과 ‘정미 7조약’의 체결로 국망의 상황이 가시화 되자 재차 의병봉기를 단행했다. 그것이 바로 1907년 음력 9월 호남창의회맹소의 결성이다. 호남창의회맹소는 호남지역 의병부대를 규합하여 조직한 연합 의병 지휘부였고, 그 대장은 성와의 스승인 성제였다. 성제는 1907년 10월 의병을 이끌고 고창 문수사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고, 나아가 12월 7일에는 영광 법성포를 탈환해 일제의 식민기관과 일본인 가옥을 불태우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이 때의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당시 22세의 청년이었던 성와의 성품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스승을 도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이듬해인 1908년 스승인 성제 선생이 생을 마감하자 성와는 이 곳 산중으로 은둔, 초막을 짓고 인재를 불러모아 노사 기정진 선생으로부터 이어지는 도학사상을 강론하고 경전을 연구하는 등 민족의 자존심을 고양에 심혈을 기울였다.
-정사 몇 칸이 덕림을 차지하고/ 숨은 자취 허다해 예와 지금 같구나/ 댓돌 앞에 서면 사슴의 울음소리 들리고/ 난간 밖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주경야독은 세업으로 전해오거니/ 봄바람 가을달에 내 마음 맑게하리/ 상로 슬퍼하니 해가 이미 깊었네.-
‘덕림정사’의 원운을 빌어 지은 성와 선생의 싯귀절은 나라잃은 선비의 비통함이 잘 드러나 있다.
자욱히 안개 덮인 칠산바다를 바라보며 내려오는 덕림정사 오솔길엔 청매화 향이 코 끝을 자극했다. 마치 한말 지조높던 성와 선생의 체취를 풍기기라도 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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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9년 5월부터 3년여 동안 본 시리즈의 그림을 맡아 수고해주신 박주하 화백께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합니다. 이번회 부터는 한국화가 장복수씨가 함께합니다. 장 화백은 조선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시·도전 추천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관심 부탁드립니다.
그림·사진// 한국화가 장복수
글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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