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생가 기운과 윗대 선영 지기로 대권 오른 듯”
[풍수기행] <44>역대 대통령 생가와 선영(9) -김영삼 前대통령의 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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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 대통령의 선영은 생가터가 있는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 인근에 있어 간산하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선영의 혈처는 크게 세 군데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가장 윗대 선영의 묘역의 경우 생가터를 이루는 근조산과 주산은 물론 현무봉을 함께 하고 있는 생가 바로 윗쪽에 자리잡고 있다.
조부모 산소는 생가터의 백호에 해당되는 하나의 산봉우리를 현무봉으로 삼아 마을로 넘어서는 길 바로 윗쪽 산기슭의 대숲 아래에 있다.
그리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손수 점혈해서 안장했다는 그의 모친 산소는 생가터에서 정면에 놓인 생가터 안산의 왼쪽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생가에서 정면으로 건너다 보이는 곳이다.
풍수지리학 관련 문헌과 인터넷 등 여러 정보 매체를 통해 알려진 김영삼가의 선영에 대한 간산평은 서로 달라 직접 용맥을 측정하고 심혈해 보지 않고서는 어느 주장과 평가가 옳은지 변별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필자와 일행은 이 세 군데의 후룡과 혈처에 이르는 용맥의 교도를 정확히 측정하기로 하고 우선 윗쪽 선대 묘역부터 답산에 나섰다.
측정 과정에서 놀랍고도 새로운 사실은 근조산인 강망산에서 내룡한 용맥이 주산을 세우고 그 한가닥은 백호맥으로 분지를 세운 다음 주룡의 힘찬 용맥이 낙맥, 결인해 현무봉을 아름답게 일으켜 세웠다. 그 깃점은 생가터로부터 내려가는 용맥과 나란히 출맥해 건해맥(서북방에서 동남방으로 진행하는 맥)에서 분맥돼 생가터를 이루는 용맥의 짜임새와 동일한 형세를 이루면서 혈을 맺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뿌리를 두고서 두개의 알찬 열매를 맺는 형국을 이뤘다는 얘기다.
혈의 본원이 되는 태조산격의 계룡산에서 북병산을 거쳐 국사봉을 세운 다음 근조산인 강망산에서 크게 지기를 응축한 후 북진한 기맥이 몸을 틀어 동진하며 대계마을 뒷동산의 한자락에서 출맥한 용진처에 지기를 응집시킨 진혈처가 바로 7명의 선조들이 묻혀있는 묘역인 것이다.
현무봉에서 함께 출맥했다가 가까이에서 용맥의 교구를 형성한 진혈처가 선대들의 묘터이고, 멀리 돌아서 같은 형태의 교구통맥을 이룬 다음 지기를 응결시킨 진혈처가 생가터를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두 곳 혈처가 공히 삼태교구로 결혈된 귀격의 명당대지인 까닭에 쉽게 찾아보기 힘든 진귀한 명혈이 아닐 수 없다.<산도 참고>
심찰하지 않고 또한 정확히 실측하지 않을 경우 생가터로 내려가는 맥을 선영묘터의 호종맥으로 속단하기 쉽지만 두 용맥 모두가 용진혈적의 조건에 들어 맞았다. 즉 곤, 건, 간의 좌선룡 삼태교구가 확실하다.
또 외포천을 끼고 좌선으로 내려가 망월산을 바닷가에 새운 외청룡과 현무봉에서 주룡을 옹위하며 내려가는 내청룡 또한 큰 동섬으로 연륙된 바닷가의 끝 자락까지 혈처를 포옹하는 형세를 갖춰 작국에 손색이 없는데다 포구로 형성된 명당수가 다정하게 내명당을 이루니, 명혈의 요건을 갖췄다고 확신할 수 있다.
우백호는 금성체와 목성체인 탐랑성의 귀봉을 세우고 크게 돌아서 내명당을 환포하며 그 끝자락이 마무리된 수성체의 산봉은 흡사 닭의 볏을 닮은 계관사를 형성하면서 선영묘역과 생가터의 안산으로 앉혔으니 그 국세가 안정되고 고요해 정답기만 하다.
다만 백호 등이 3개의 수봉을 세우면서 혈처를 싸고 돌아 수고(秀高)한 봉우리가 오히려 혈터를 옹위해 주는 것이 아니라 고압하는 형세가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원래 좌청룡과 우백호는 혈처의 높이보다 약간 높거나 같은 높이의 잔잔한 용맥으로 발달해 둥글게 혈처를 싸 안듯이 환포하는 형태로 되면서 마무리 과정에서 서로 만나 교쇄해야 제격이다.
그래서 혈을 중심으로 한 국세에 흘러 모아진 물을 청룡백호가 교쇄하는 한 곳으로 흘러가는 형세를 이루고, 혈의 좌우와 전면에는 평평하고도 적당한 넓이의 내명당이 형성돼야만 한다.
그래야만 혈처에 응결된 상서로운 지기가 잘 보존되고 기가 흩어지지 않아서, 묘소에 안장된 체백이 잘 보존된다. 또 동기감응의 작용을 활발하게 할 수가 있다.
이렇듯 명혈대지로 자리잡아 그 발음에 의해 대권을 성취할 수 있었던 곳으로 여겨진 7개 묘소에 12명의 선대가 안장된 묘역 관리상태는 너무 허술하고 볼품이 없었다.
하나의 와비에 새겨진 선대들의 명단이 묘역을 지키고 있었다.<사진참고>그것 마저 없었으면 묘역에 몇명의 선조들이 안장됐는지 조차 분간하기 어려울뻔 했다.
여기서 필자는 묘역을 호화판으로 단장하는 것과 용진혈적에 의한 발복과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행은 조부모 산소를 찾아갔다.
조부모 산소는 생가터의 우맥호자락의 꽤 높은 산봉을 현무봉으로 삼아 낵맥된 산 자락의 끝 부분에 속하는 곳이었다. 특별히 명당대지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고 형기에 의존해 정혈한 보통의 자리에 불과했다.
혈까지 이어진 맥이 뚜렷하지 못한데다 밋밋한 비탈에 의지해 자리잡고 있어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혈 뒤 투구모양의 ‘봉바우산’ 형세가 ‘장군형’의 혈을 지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물형에 버금가는 진혈대지의 요건을 찾지 못했다.
조부모 산소는 보통 민묘같이 소박하고 단촐한 형세인데 묘비와 상석에 십자가와 성도란 글귀가 새겨진 것으로 봐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을 것으로 짐작이 갔다.
알려진 바로는 조부 김동욱은 마을에 신명교회를 세울 만큼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고 한다.
일행은 발길을 돌려 김 전 대통령의 모친인 박부연 여사의 산소로 다가갔다.
모친 묘소는 조부모 산소의 현무봉격인 봉바우산에서 낙맥해 결인하고 나서 마을로 통하는 작은 고개를 만든 다음, 다시 서서히 완만한 비룡맥을 형성하면서 우선룡으로 돌아 회룡한 후 이른바 생가터와 윗대 묘역의 안산이 되는 계관사의 낮으막한 세 봉우리 수성체의 아름다운 산봉을 앉혀 놓고는, 백호자락(생가 및 윗대 선영터)의 일생에 마침표를 찍는 그 끝자락 산봉에 단아하게 자리잡고 마을을 건너다 보고 있었다.
마을 뒷산 너머 멀리 강망산을 돌아보고, 마을 우측 봉바우산을 주산으로 빙글돌아 온 용맥이 혈을 이뤘으니 회룡고조형(돌아서 자리잡은 혈이 그 근원이 되는 조산을 바라보는 형국)이 틀림 없었다.
주산인 봉바우산에서 낙맥한 용맥에서 부터 혈장까지는 분명 우선룡의 3태교구가 형성된 것을 실측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무리 지점의 용맥교도인 미곤(서남방에서 15도 남방으로 치우쳐 동북북방으로 뻗는 맥)의 맥을 좀더 정확하게 측정해 혈입수인 미맥의 결혈처에 정혈이 됐다면 더 없이 좋았을 것으로 여겨졌다.
이 부문에서 선사들이 늘 강조했던 “재혈시 털끝 만큼의 오차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경구가 떠 올랐다.
무엇보다 산소의 뒷쪽 상단 오른쪽에서 부터 언덕 아래로 흐르는 용맥 여기의 줄기가 눈에 보여 더욱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물론 이런 견해는 필자의 주관적인 분석에서 나온 결과이므로 참고하기 바란다.
김 전대통령의 모친이 묻힌 곳에서 바라다 보이는 경관은 아름답기만 했다.
넘실대는 바닷물 너머로 좌전방에 대금산, 우전방에 목형의 망월산이 짝을 이루 듯 포진하고, 마치 손자를 바라보듯 멀리 강망산이 응시하고 있는 이 곳 지세와 풍광은 너무나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대지명혈의 요건을 두루 갖춘 곳이지만 용진의 지상목표인 혈적에 동의할 수 없는 아쉬움을 뒤로 한채 먼 바닷길이 기다리는 신안 하의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가와 선영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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