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풍수기행

“성장기 보낸 터는 용진혈적의 빼어난 혈”

화이트보스 2009. 1. 22. 10:51

[풍수기행]“성장기 보낸 터는 용진혈적의 빼어난 혈”

<68> 대권 입지자‘3인’생가와 선영 (6) - 이명박 前서울시장 생가(성장기의 터)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생가터와 선영은 경상북도 포항시와 관계가 깊다.

왜냐하면 이 전시장의 선친과 그 윗대가 삶의 터전을 잡고 살아 온 땅이 바로 포항땅인데다가 선영들 마저도 거의 포항땅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 서울시장과 그의 장형 및 중형 그리고 세 명의 누이들도 생가터는 일본의 오사카시 일우라고 전해지고 있다. 타향도 아닌 타국의 이역만리의 낯선 땅을 생가터로 갖게 된 이 전시장의 6남매 운명은 일본의 강점기 시절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어서 조국의 불운한 시대상황과도 맞아 떨어진다. ‘신화는 없다’는 이명박 전시장의 저서에 보면, 그의 선친 충우씨는 1935년 살길을 찾기 위해 당시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시의 교외에 있는 한 목장에서 목부의 일을 맡아 일했다고 한다. 수년 동안 천신만고의 가난을 무릅쓰고 열심히 일한 덕분에 그곳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일시 귀국해서 결혼한 후 다시 일본 오사카의 일터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이충우씨 내외는 6남매(3남3녀) 를 낳아 키우다가 일본이 패망하자 그해 11월에 귀국했다. 그 때 이 전 시장은 4세의 어린 아기였다. 따라서 이 전시장이 그 부모로부터 잉태와 출산의 의미를 간직한 일본 오사카는 어디쯤인가도 알아내기 어렵고, 알아낸다 해도 현재로선 답산하기가 매우 어려운 처지이다. 다만 형들과 이 전시장이 누대의 가난과 시련을 딛고 교수와 국회의원(중형 상덕씨) 등 입지전적인 인물들로 성공하고 있는 것을 미뤄 유추해 보면 그들이 잉태와 출산 그리고 성장했던 오사카의 목장 근처의 생가터는 적어도 이태교구 이상의 명터였지 않나 여겨질 뿐이다. 필자가 그렇게 관련적 평가로서 생가터를 용진혈적의 이름을 붙이는데는 그만한 근거가 있다.

필자는 일본을 세번 다녀왔다. 그때마다 오사카시를 모두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그곳에 유적지와 역사적 유래 등을 살피고, 주변 산세를 보면서 일본땅에서 몇 번째 안에 드는 수려하고 조화롭게 잘 짜여진 산세를 보면서 예사롭지 않는 텃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또 어떤 운명적 과정에서든 일본에서 태어나 다시 한국으로 귀국해 요직에 올라 자기 몫을 해 내고 있는 명사들이 한결같이 오사카 출신이라는 것을 주변에서 많이 들어왔다.

따라서 필자가 직접 눈으로 확인했던 오사카의 형세적 운기와 관련해 보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케 했다. 그리고 풍수지리학적으로도 ‘어떤 터에서 잉태되어 출산하고 성장했는가가 그 사람의 일생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변인’이 된다는 것 또한 간과 할 수 없다.

주룡맥이 충만한 지기를 공급해 온 그 마무리의 용진혈적에 서리는 서기의 땅기운을 받고 잉태된 순간과 그렇지 않은 경우와는 그 출생 주체자의 일생이 너무 확연하게 달라진다는 것이 곧 ‘인걸은 지령’에 담겨진 풍수지리의 신묘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이는 “훌륭한 자녀를 두려거든 부부가 명당 터에서 잠자리를 해야 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암도스님(전 백양사 주지)의 말씀도 생가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똑같은 천하의 명당터라도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은 그 터에서 잉태와 출산 그리고 장기간의 성장기를 보내야 된다.

되고 다음은 잉태와 출산을 명터에서 하되 성장기는 다른 고장에서 보내그 다음이 명터에서 잉태해 다른 곳에서 출산과 성장기를 보낸 것의 순서가 된다.

왜냐하면 부부가 합궁해서 태초의 생명 출생요인을 가질 때 부부의 음양 기운과 집터의 청기가 조화되어 그 수태가 정기를 타기 때문에 잉태의 순간이 중요한 것이다.

출산이 다음 중요한 것은, 산모의 뱃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와 첫 호흡을 하며 삼라만상의 기를 찰라적 순간에 호흡해서 태아의 몸속에 통기 시키게 될 때 그 빨려들어가는 기(天氣와地氣)가 어떤 것이냐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 성장기도 어린시절에 지기의 습득이 예민하고 강할 때 어떤 터에서 그 기간을 보내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생득적인 요인에 따라 등급을 따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이야기의 실마리를 경북 포항시 흥해읍 덕성1리 덕실마을로 되돌린다. 이곳이 바로 이 전 서울시장이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부모형제를 따라 처음 정착지로 정해져 4살 부터 포항시내 달 동네로 가기전까지 머물렀던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 그 터에다 옛 집을 헐고 새 양옥집(사진)을 짓고 살고 있는 사람은 이인학씨였다. 그를 만나 여러가지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일본으로 건너가기전까지 이 전시장의 선친이 나서 자란곳이 바로 덕성1리 538번지에 자리잡은 초라한 시골집이었고 그 이전의 선대 부터 월성이씨들이 이곳에 터를 잡아 살아있다고 한다.

이충우씨(이 전시장의 선친)는 일본으로 가면서 그의 종형에게 자기의 생가터이자 누대에 걸쳐 살아 온 그 보금자리를 관리해 주도록 맡겨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귁국과 더불어 다시 그 집에서 7~8년을 살다가 포항시내로 이사를 갔고, 그때 그 집을 인수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 전 서울시장은 4세부터 11세 전후까지 그 터에서 성장기를 보낸 셈이다.

<산도>에서 보듯 근조산이라 할 목성체(탐랑성)의 고주산에서 낙맥, 결인, 과협, 위이 등 주룡의 체계적 순서(주룡의 윤서)를 거쳐 좌선룡으로 회룡해 여섯번의 박환절용의 교도를 거쳐 3태교구(곤신-경유-건해-임자-간인)의 통맥을 통해 작혈, 성신(산봉)이나 용맥의 행도나 그 교도의 흐름이 분명 ‘용진혈적’의 가혈(佳血)이었다. 물형으로는 ‘매화낙지형’이다.

그 명혈에 생가터를 둔 이 전 시장 선친의 기상이 유전학적으로 감승되고, 그렇게 태어난 3형제가 왕대밭의 왕대처럼 크게 그 기상을 계승해 오늘의 큰 인물로 뻗어나고 있다고 여겨진다.

4세부터 6~7년간 3태교구의 용진혈적에 서린 청기의 땅기운을 받고 성장한 이 전시장의 운명적 운기는 결코 헛되게 평가할 요인 일 수는 없다고 본다. 그 전에 그처럼 명혈의 양택을 사들여 고옥을 헐고 새로 지은 집에서 살게 된 현재의 집 주인 이인학씨가 안타깝게도 지체가 부자유스러웠다. 결례를 무릅쓰고 그 연유를 물은 즉 본채를 헐고 새로 성주하는 동안 아랫채에서 임시로 기거하게 되었는데 그 때 까닭없이 몸이 자유스럽지 못하고 불편하더니 이내 지체 부자유의 상태가 되었다고 속내를 털어 놓았다. 명혈의 부근에는 그 터에 서린 지기(地氣)를 설기시키지 않게 하는 수맥이 에워싸고 있게 되는 것이 혈장의 구조인데 이를 일러 풍수지리학적 용어로는 상수(相水)라고 하며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다. 지하에 깃든 수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선사들은 털끝 만큼의 잘못된 점혈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한 것이리라.

동행했던 수맥탐지의 전문가에 의해 실측한 결과 지금도 새로 지은 집터는 땅기운이 가득 서리어 감돌지만 아랫채가 있었던 자리(창고)에는 강한 수맥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생가터를 ‘성장기 터’로 소개한 점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다음회는 이전 시장의 증조부모 산소를 소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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