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풍수기행

“옥녀단장형의 나산마을 수많은 인재 배출”

화이트보스 2009. 1. 22. 11:01

[풍수기행]“옥녀단장형의 나산마을 수많은 인재 배출”

<70>우리고장의 인물과 풍수(5) -불갑산아래 함평의 음·양택 길지(상)


 






그동안 대권 입지자 생가와 선영의 간산기에 밀려 잠시 중단했던 ‘우리고장의 인물과 풍수’를 다시 시작한다.

이번회엔 함평군의 음·양택 명당과 이에 관련된 인물을 소재로 삼았다.

이 전에 소개했던 곡성군 통명산하의 음·양택 길지와는 소재의 범주가 다르다.

즉, 양택명당의 마을을 한 곳으로만 한정하지 않고 3개 마을의 길지를 예로 들었다는 것이다.

어느 고장이든 그 소재가 한 마을로만 딱히 한정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길지로서의 터에 다른 대소경중이나 인물의 배출면에서 그냥 지나치기가 몹시 아쉬운 곳이 있기 마련이다.

이번 풍수기행은 풍수지리학에 의미와 근본을 둔 탓으로 고장이나 성씨에 따라 형평성을 따져 소개하기란 매우 어렵다. 또 취지에도 걸맞지 않다.

지난번 소개한 곡성군의 통명산은 전남·광주의 명산 무등산을 발조(發祖)의 본원으로 삼지 않고, 노령산맥에서 분지돼 별도의 산맥에 근원을 두고 있는 특징이다.

다음회에서 그 내룡의 형세도를 소개하겠지만 광주·전남지역에 발달해 있는 모든 산맥의 태조산이 무등산에 있지 않고, 상락의 지점에서 갈라져 내룡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함평지역에 분포된 산세의 근원이 이에 속한다.

백두대간의 한 가닥인 남덕유산을 기준으로 하면 호남지역에 분포된 모든 산맥의 모태는 그 맥락이 같아진다.

그러나 전북 왕자산과 소장봉을 지나 순창군 쌍치면 학서리의 분지점에 이르러 동남쪽으로 마리를 틀어 회문산으로 나아가는 용맥이 결국 무등산으로 내룡하는 큰 줄기이다.

또 서남방으로 방향을 바꿔 노령산맥으로 이어져 고당산, 신성봉, 입암산, 방장산을 거쳐 영광군의 고성산과 영광군과 함평군의 경계를 이루며 수봉으로 솟아오른 불갑산에 다다라 함평 전역의 산세가 여러갈래로 뻗쳐 나간다. 그런데 단 한가닥의 용맥만은 불갑산에 그 연원을 두지 않고, 그 보다 훨씬 북쪽 지점의 장성군와 영광군의 군계를 이루며 솟아 있는 장암산(481.5m)에서 남쪽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연정재를 지나 분맥 돼 칙고개와 장성군 삼서면 금산리와 함평군 월야면의 군계에 곱게 솟은 발산과 월악산을 거쳐 광주시 삼거동과 월야면 양정리를 경계 삼아 내룡하다가 나주시 문평면과 함평군 나산면 산평리를 갈라치는 구절봉을 지나, 남하 하다 대치에 이르러 한 줄기 생기에 찬 용맥이 북서쪽으로 회두해 이위, 기복, 과협, 비룡을 거듭한다. 또다시 서쪽으로 진로를 바꿔 아름다운 옥녀봉을 앉혀놓고 그 중심맥이 대정·동신마을(나산마을)로 내려와 안착하고 이내 한 자락은 대정마을과 동신마을, 방하마을을 포옹하며 양택길지의 우백호 자락을 형성한 다음 고막원천을 만나 그 일생을 마무리한다.

물론 옥녀봉으로 진행돼 오던 용맥의 한 자락이 왼편으로 낙맥결인해 마을터를 싸고 안아 주는 좌청룡을 형성하고는 우백호자락과 교쇄하며 양택명당내의 물이 모아져 빠져 나가는 수구를 만든다.

그 국세와 보국이 명당길지를 입증하고도 남는다.

그 주룡맥이 확실하고도 강세룡에서 발원돼 평야지대를 꿈틀거리면서 줄기차게 이어져 왔으니 그 용맥의 역동적인 움직임(動)이 지속돼 오다가 용맥과 지기가 마무리 돼 매조지를 하는 옥녀봉에 이르렀으니, 동(動)에서 정(靜·고요함) 을 만나게 돼 멀리서 간직해온 땅의 기운이 이 곳에 감돌아 서릴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 양택길지가 곧 옥녀단장형(玉女丹粧形)의 나산마을이다.

옥녀가 곱게 머리를 빗고 단장하는 형국인데 면경사(거울모양의 산)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300년전쯤 연못을 겸한 저수지인 남호(南湖)를 축조했다고 하니 풍수지리를 신봉한 나머지 마을터의 결점을 보완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아무리 양택길지라 해도 몇몇 소수의 특수한 인물만 배출된다면 영구지지의 명터라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 나산마을의 명당 양택에서는 1910년 이전에 타계한 왕조시대의 인물 68명과 근세사에 배출된 인물 94명이 함평군 향토문화연구회와 나산마을사의 인물편이 등재돼 있다.

한 마을의 역사를 자연사와 인문사에 걸쳐 355쪽으로 소상하고도 체계적으로 엮어 펴낸 사례도 썩 드문일이고 귀감이 될 일이다.

역사를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그 역사를 기록해 남기는 일도 사람의 손에 이뤄진다.

나산마을사에 실린 기라성같은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서 필자는 다시한면 ‘인걸은 지령’이라는 풍수지리사상의 깊은 의미를 되새긴다.

나산마을 입향조인 안충달은 1534년에 퇴계 이황과 함께 과거에 급제해 교우가 깊었고 강원도사 병조좌랑을 역임했으며, 조선조에 안여지(1654), 안여기(1669), 안치택(1739), 안형직(1795) 등 5명이 문과에 급제했다. 특히 안형직은 78세의 고령에 급제했다.

또 정 5품 벼슬인 통덕랑을 지낸 인물도 안만영(1648~1715)을 비롯 15명에 이른다.

그리고 효행으로 통정대부를 제수받은 인물만도 안수직 등 5명에 달하는 등 왕조시대에 인물들의 활약상이 돋보인다.

근세사의 인물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독립운동가로 책정돼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안종변을 비롯 초대 나산면장 안기주와 4대까지의 면장출신도 이 터의 인재들이다.

4명의 의사와 5명의 교수, 각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은 5명의 박사가 나왔고 14세때 광주시 광산구로 출향한 국창 임방울도 이 마을 출신이라고 한다.

교육계에서는 안석두 전 교육장을 위시해 초중등학교 교장들도 줄지어 배출했다. 광주교대 총장출신인 이정재 교수도 이곳 태생이다.

서울대 미술대를 졸업하고 국전심사위원장을 지낸 안동숙 등 예술계의 자리를 지킨 인물과 종교계를 빛낸 목사들도 상당수 배출됐다. 준장 예편 후 내과의원을 개업한 안태수 등 5~6명의 무관출신과 외무고시에 합격, 주미 한국대사관에 근무한 김은석 정무관도 이 마을 출신이다. 한때 나산그룹을 창업, 재계의 한 자리를 차지했던 안병균 전 회장을 비롯, 실업가들도 속속 배출돼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왜 함평땅에서 유독 나산마을 출신들이 이렇듯 국가, 사회를 위해 자기 몫을 다하는 인재들로 성장해 출세길에 들어선 것일까.

여러가지 변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길지의 텃기운을 받고 태어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것보다 성공의 길을 달릴 수 있다’는 말을 더 깊이있게 되새겨 보게 하는 곳이 나산마을이다.

옥에도 티가 있다고 했던가.

명당터로서 손색이 없는 듯 보이지만 찬찬히 분석해 보면 여기에도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옥녀봉이 오른쪽에서 비껴오르니, 횡룡인데 그 뒷쪽의 배경이 되는 낙산이 있거나 버팀목이 되는 귀성이 있으면 더 좋았을 것을….

그게 아니라면 옥녀봉 뒷면 가까이 큰 냇물이나 저수지라도 받쳐 줬다면, 나산의 번성은 일취월장 했을 터이다.

그리고 우선룡으로 내룡이 돼 현무봉을 세웠으니, 끝까지 우선작국으로 집터를 만들었다면 그 양상은 달라졌을 것인데, 우선으로 치솟아 옥녀봉을 세운뒤 거기서는 좌선으로 변국 돼 낙맥이 되니 지기가 감소되는 현상을 막을 길이 없어 보인다.

필자가 금상첨화를 바라는 욕심에서 소견을 피력했을 뿐, 완전무결한 혈터가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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