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풍수기행

“옥동·두동마을 수많은 인재배출…국가발전 밑거름”

화이트보스 2009. 1. 22. 11:08

[풍수기행] “옥동·두동마을 수많은 인재배출…국가발전 밑거름”

<71>우리고장의 인물과 풍수(6) -불갑산아래 함평의 음·양택 길지(중)


 






함평군에는 음택명당보다 양택명당이 더 많고, 그 규모 또한 크다는 사실을 이번 간산을 통해 알게 됐다.

문헌이나 향토사료에 실린 내용에서도 역시 이를 뒷 받침하고 있다.

다음회에 소개하겠지만 함평군에는 호남 56대 대지명당에 드는 음택은 1개소 밖에 없고, 집성촌을 이루며 양택길지에 살아온 인물의 고장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살아 생전에 명당기운을 받아 복되고 건겅한 삶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임을 계도하고, 그에 관한 정보를 나눠 가질 수 있도록 양택길지와 인물에 초점을 맞춰 소개한다.

요즘 생활터전을 자연을 벗삼아 살 수 있는 농어촌 전원으로 바꾸려는 추세가 강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전원으로 생활터전을 옮길바에는 생기가 넘치고 지기가 서리는 곳에 보금자리를 잡아야 생기있는 활력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임 연령대에 속하는 젊은 부부일 수록 후대를 위해 더욱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길지에 옮겨 자리잡아야 한다.

이렇듯 주거환경을 바꾸려는 사람들에게 양택 풍수지리에 관한 간산기를 소개하는 본 풍수기행이 어느 정도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는다.

이게 바로 생활풍수에 접근하는 하나의 길잡이가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미 검증된 집터를 중심으로 소개할까 한다.

이번 간산은 함평지역에 삶의 터전을 두고 살아온 사람들의 구전에 따라 그 대상을 선정하려고 했지만, 보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준거를 두고 답산 대상의 마을을 찾았다.

또 함평땅에 누대에 걸쳐 생활터전을 두고 있는 김영호 선생의 조언과 건네 받은 자료를 크게 참고했음을 미리 밝혀둔다. 또 김 선생의 조언에 깊은 감사를 표한다.

함평군은 전회에 소개한 나산마을외에도 인물의 양택명당으로 손색이 없는 마을이 꽤 있다.

그 중에서 풍수지리학적 관점에 준거를 두고 대동면 옥동마을과 대동면 두동마을을 소개한다.

우선 옥동마을은 철성산이 내룡맥중 대 지룡맥이 마무리되는 옥녀봉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산도>에서 보듯 철성산은 불갑산의 주룡맥이 군유산으로 세차게 진행하면서 그 중간에 347m의 모악산을 먼저 세우는데, 그 모악산에서 응취된 지기를 타고 신광면과 해보면의 경계를 이루면서 강세룡으로 내룡하다 후중하면서도 정기가 크게 머금은 병풍산을 일으켜 세우고 이내 낙맥 결인한 다음 법흥사로 통하는 재에서 기세있게 비룡하는 맥이 해발 262.2m의 철성산 정상에 오른 다음 크게 기복을 거듭하며 고막원천과 그 사이에 펼쳐진 드넓은 평야지대를 향해 행룡한다.

그렇게 형성된 산봉중에서 유독 빼어난 만두에서 왼쪽(행룡상태에서 봄)으로 머리를 틀어 낙맥한 주룡맥 한자락이 이위, 기복, 과협의 윤서를 밟아 좌선한 다음 비룡하며 마무리의 현무봉을 빼어나게 세운다.

이 산봉이 곧 옥동마을의 배경인 옥녀봉이다.

여기서 주목해 둘 간산의 특징은 그 주룡맥을 잘 보존해 주기 위해 미리 철성산의 한 주필봉이 낙맥해 호종하면서 따라 붙어 주룡맥의 지기를 잘 관리 보존시켜 주고 있다는 점이다.

현무정인 옥녀봉에서 좌선으로 낙맥하며 입수한 마무리 용맥이 교구통맥을 형성하고 마을 바로 뒷켠에 뇌두를 만들고는 그 강세룡의 지기를 살며시 청기로 바꿔 집터(마을터)로 내려 놓는다.

마을앞에 펼쳐진 드넓은 논의 평야는 마을의 내명당을 이루고 평야를 끼고 흐르는 고막원천이 내명당을 휘감아 돌아서 영산강으로 흘러가며 수구를 만든다.

옥동마을은 79세대 268명이 논밭을 일구면서 500여년의 역사를 이어받아 살고 있다.

79세대중 타성의 9세대를 제외하고 70세대가 파평윤씨로 이뤄진 집성촌이다.

옥동이 마을을 이룬 것이 입향조인 파평윤씨 16세손 윤처중(이조정랑)으로 부터 비롯됐다고 한다.

발조의 태조산이 빼어나고 내룡한 용맥이 생기넘친 주룡이자 마무리의 현무봉이 수봉이며 마을로 인입된 입수룡이 이태교구를 형성했으니 용진혈적의 양택명당이 틀림없다.

이런 길지인 탓에 현달한 인재가 배출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풍수지리의 이치이다.

임진·장유재란때 의병을 일으켜 창의의 공을 세운 윤황을 비롯, 1589년 준랑시에 급제해 구성부사를 지낸 윤길, 한시에 능통했던 윤제민, 윤용상 기독교방송국장, 4선의원 출신의 윤인식씨, 윤원중 국회의원, 윤경중 경찰 총경, 윤이중 전남대 교수, 윤기술 무안교육장과 윤병주 전남도교육연구사 등 수 많은 인물이 배출됐다.

또 윤병진씨, 윤기씨 등 사회사업과 청소년선도에 기여해온 인사들도 이 마을 출신이다.

옥에 티가 있듯이 옥동의 양택은 용진혈적에 비해 그 지기를 관리 보전하는 울타리가 너무 허전하다.

물론 멀리 흐르는 고막원천이 수청룡으로의 역할을 한다지만 마을을 껴안고 환포하지 못한 점이 아쉽기만하다. 그런 탓일까.

인물의 맥이 연이어 계승되지 못한다고 한다. 또 철성산의 간룡에서 분지된 맥이 마을터의 주룡을 이루고 있는 점 또한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제 대동면 복천리에 소재한 두동(斗洞)마을을 살펴볼 차례다.

철성을 쌓았던 성터라서 철성산이라 이름붙여진 이 산은 이름만큼이나 마치 철성 같은 강세룡이며, 그 본원에서 내룡한 용맥 또한 생기넘친 용세다.

철성산 정상에 올라 멀리 보이는 내룡맥은 마치 승천의 세를 얻은 용처럼 그 기세가 당차다.

그런 연유에서 인듯 철성산 정상에서 분지된 용맥의 한자락은 예의 옥동(玉洞) 양택길지를 만들고, 그 대지룡의 본맥은 좌선룡이 마무리된 곳에 함평군의 제일승지의 음택명당 ‘맹호출림형’을 결작하고 있다.

철성산의 결인목에서 한 자락용맥은 그 기세를 꺾지 않고 오석고치로 이어지고 다시 소일치와 내동치로 연이어진 다음 회룡해 마치 한송이 무궁화처럼 아늑한 곳에 오롯이 지기를 내려앉혀 맺게한 양택길지를 그 끝자락에 작혈하고는 모악산으로 부터 발조된 용맥의 일생을 마무리한다.

이곳이 곧 두동마을 터이다.

필자가 이 마을을 찾았을때 첫 인상은 한송이 모란꽃을 연상케 해 그 물형을 ‘모란만개형이지 않겠는가’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을을 둘러싼 4개의 산봉이 마치 곡식을 되는 말(斗)과 같다해서 마을이름을 두지동(斗之洞), 두서(斗西)라 했다가 끝내는 두동이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이 마을은 25세대중 24세대가 함평노씨의 집성촌이다.

입향조는 함평노씨 8세손인 희안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1395년경 함평노씨 7세 신(愼)이 동지들과 함께 두문동으로 은신했으나 조선조 예외출사를 권유하는 기풍이 치열해지자 지금의 한평군 월야면 월악으로 피신해 여생을 마쳤다.

그의 소생 3형제 중 둘째인 희안이 이곳 두동부근으로 내려와 정착했다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짧은 견해로는 두동의 양택은 명당길지이나 그 국세가 더 드넓었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어쨌든 명터로서 지나치지 않게 잘짜여진 명당마을이다. 명터인 탓에 근세들어 많은 인물이 배출됐다.

효심이 깊어 1887년 왕으로 부터 명정이 내려 세효각이 건립하게 한 노봉채, 노영숙, 노재홍을 비롯 육영재를 건립해 영재육성에 정진한 노태신, 조흥은행장을 역임한 노준수, 학교면장을 역임한 노상열, 광주지검장을 지낸 노승행, 사시를 합격해 검사를 지낸 노영근, 노경완, 의학박사 노광을, 조선대 교수 노승재, 교장출신의 노봉구, 노인근 등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돼 국가와 지역사회발전에 기여했다.

이밖에 이용섭 건교부장관도 함평에서 태어났다.

옛부터 ‘탯자리가 좋아야 출세한다’는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하는 풍수기행이었다.

용세로나 작국형세로 봐서 양택명당이라 할 수 있는 모평마을을 상세히 소개할 수 없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함평의 음택명당을 돌아볼 예정이다.




[ 기사 목록으로 ]     [ 프린트 서비스 ]      [ 메일로 보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