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적 위기관리와 통일
김정일의 건강이상설을 계기로 하여 국내외에서 북한 ‘급변사태’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는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사실 북한의 ‘급변’ 상황을 가정한 대응책은 일종의 위기관리 방안으로서 불안정 요인에 대한 통상적인 대비책으로 인식된다. 한국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가 평화번영기에도 위기관리 능력의 보유는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이는 불가피한 상황을 가정한 소극적 대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의 ‘급변’ 가능성 여부는 통일의 당위성과 과정을 논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삼기에 적합하지 않다.
1990년대 중반부터 지속된 경제난으로 인해 북한 주민들은 인도주의적 위기에 직면해 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스스로의 개혁개방 가능성은 희박하다.
더욱이 김정일 후계구도의 불안정성은 언제라도 북한 정국이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이미 비정상적 상황이 일상이 되어버린 북한의 현실을 볼 때, 더 이상 북한의 급변사태의 발생만을 전제로 한 통일 논의는 바람직하지 않다. 이제 ‘급변’이 아니라도 통일 논의가 일상이 되어야 할 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통일을 말할수록 통일은 멀어 진다’는 ‘회피론’과 통일비용의 사회적 경제적 부담을 우려한 ‘부담론’ 등으로 인해 ‘통일 공포증’이 확산되었다. 또 통일에 대한 진지한 논의보다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위한 정책 수단 개발에 치중해 온 것이 사실이다.
통일정책의 복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반적 개념의 위기관리 방안에 더해, 2009년 현재의 북한 및 주변 상황을 감안한 현실적 통일 가능성과 통일 과정에 대한 논의이다.
북한 주민이 겪고 있는 인도주의적 위기는 북한이 이미 정상적 국가 권력으로서의 정당성과 역량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통일의 필요조건이 된다. 한편 통일은 남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 사안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한반도 미래에 대한 주변 이해 당사국의 협조는 통일을 위한 충분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의 통일정책이 동북아 역내 질서에서 관건이 되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과 궤(軌)를 달리한다면, 한국 주도의 통일 논의는 현실적 의미를 상실할 수도 있다.
세계금융위기는 또 다른 맥락에서 통일문제를 조망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아직 금융위기의 끝자락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지만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외부환경 변화에 따른 거시경제의 파동을 막기 위해서는 내수 확대를 통한 안정성 확보가 중요하며, 이는 곧 국민경제의 자체 성장 동력 유무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또 신자유주의의 한계성 노출과 보호주의 강화로 인해 경제규모와 자원의 확보가 중시되고 있다. 이는 지난 1970-80년대에 한국을 위시한 아시아의 소형개방경제가 경제 고도성장에 성공했다면, 21세기에 들러 중국, 러시아, 인디아, 브라질과 같이 시장과 자원을 갖춘 경제가 최고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는 배경 요인이기도 하다. 한국경제의 입장에서 본다면, 통일은 세계금융위기로 인한 구조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한 것이다. 통일여부는 한국이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다시 태어나느냐, 분단국으로서 발전의 한계성을 안고 가느냐를 결정하는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주변국 국익의 균형
한반도 통일에 대한 주변국의 입장이 확정적이며, 그들은 대체로 현상유지를 선호할 것이라는 추론은 통일에 대한 또 하나의 왜곡된 관점이다. 주변국의 입장은 자국 이해관계의 향배에 따라 유동적이며 다양한 가능성을 향해 열려있다. 중국의 대북 경제지원 역시 한반도 상황의 급격한 변화에 따른 불확실성을 방지하기 위한 위험관리 차원의 정책이며, 반통일적 현상고착을 위한 접근은 아니다. 자국의 이익이 보호될 수 있다면, 중국과 미국, 일본이 굳이 한반도 통일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 주변국의 입장은 통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독립변수가 아니라 우리의 통일정책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종속변수적 성격을 지닌다.
통일과정에서 주변국의 협력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주변국 간의 ‘이익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전략적 접근과 한국의 통일주도 역량에 대한 주변국의 신뢰가 필요하다. 특히 한미동맹과 한중간 ‘전략적협력동반자’ 관계의 조화는 미국과 중국의 협력유도에 필수적이다. 주한미군의 역할 변화, 미사일방어(MD)계획 및 확산방지구상(PSI)에 대한 한국의 입장, 한미자유무역협정(FTA) 파급효과 등은 중국이 민감하게 여기는 문제이며, 한국과 중국의 접근 속도와 범위는 미국이 우려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한국의 조화로운 접근과 투명한 방침 설정은 통일과정에서 중요한 변수가 될 수밖에 없는 미국과 중국의 지지를 유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통일역량의 확보
주변국 국익의 균형을 보장할 수 있는 접근 방식에 더해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통일을 주도할 수 있는 한국의 정치, 사회, 경제 역량에 대한 주변국의 신뢰를 획득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선 통일과정에서 북한지역을 포용할 수 있으며, 안정과 변화를 보장할 수 있는 성숙한 한국의 정치체제가 필수적이다. 또 통일 과정에서 북한주민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포용성과 역량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코리안 드림’의 실현이 불가능한 사회적 상황에서 북한 주민이 기대할 수 있는 통일은 어렵다. 한국사회의 성숙과 발전을 통해 북한의 리더십이나 주민들의 적대적 대남 인식을 해소할 수 있어야 한다.
경제적 역량은 한국이 통일을 주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조건이다. 특히 충분한 외환보유고와 안정적 경제관리,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경제체제의 구축은 한국의 통일역량에 대한 주변국의 신뢰도 확보에 반드시 필요하다. 통일비용과 관련하여 과도한 중압감은 불필요하다. 통일비용은 정책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가변적 성격을 가지며, 통일에 앞서 과도한 통일비용을 적립해 둘 필요도 없다. 세계금융위기 과정에서 보듯이 통일에 대비한 진정한 경제역량은 통일비용의 화폐적 축적이 아니라, 통일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다양한 경제적 충격을 극복할 수 있는 건강체질의 확보 여부에 달려있다. 건강한 경제체질은 통일비용을 위한 화폐의 비축과는 다른 동태적(動態的) 적응력을 의미한다. 안정된 금융시스템과 흔들리지 않는 산업 비교우위의 확보야말로 어떤 상황의 통일에도 대처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경제적 기반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통일을 위한 경제적 기반 구축’은 한국경제의 지속적 발전에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한국경제의 선진화와 상호보완적 관계에 놓여있다.
통일정책과 대북정책의 조화
정책적 측면에서 본다면, 통일역량의 확보를 전제로 하여 대북정책과 통일정책을 조화시키는 일도 시급한 과제이다. 성격상 대북정책은 비교적 짧은 시간지평을 가지며, 통일정책은 보다 장기적 성격을 띤다. 이와 같은 속성으로 인해 대북정책의 목표와 방식은 정권 변화에 따라 민감하게 변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통일과정에서 대북정책이 효율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초정권적’ 통일정책의 지속선상에서 대북정책을 조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소위 통일정책의 ‘탈(脫)정치화’ 문제이다. 또 통일의 당위성과 가능성에 대해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될 때, 이를 실현하기 위해 과감하고도 단호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정책문화’의 배양이 절실하다.
사실 모든 대북정책과 통일정책에 대해 사전(事前)적으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은 말 만큼 쉽지 않다. 때로는 정책 결과의 효율성 여부가 사후(事後)적으로 여론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북정책은 북한이라는 상대가 있는 게임(game)의 양상을 띠기 때문에 사전의 여론과 사후의 평가가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대북정책의 특성을 감안하면, ‘공감대 형성’이라는 것이 자칫 수사적 구두선(口頭禪)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정책의 합리성과 논리적 근거, 그리고 정책 효율성 제고에 대한 논의가 ‘공감대 형성’을 위한 정부의 정책 홍보에 앞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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