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건설정보 모음

죽이는 디자인. 기업을 살렸다

화이트보스 2009. 4. 15. 11:47

죽이는 디자인’ 기업을 살렸다

한겨레 | 입력 2009.04.15 09:10 | 수정 2009.04.15 09:30

 




[한겨레] 위기의 아이리버 '디자인에 올인'
지난해 60억 영업이익 흑자전환


책꽂이·베개 생산 중소기업들도


디자인 손질만으로 매출 몇배로

서울 방배동 아이리버(옛 레인콤) 사옥은 맨 꼭대기 층에 디자인실이 있다. 사장실은 디자인실 바로 아래층이다. 20여명이 근무하는 디자인실 벽면에는 다른 사무실에서 찾기 힘든 반투명 아크릴판이 세워져 있고, 이곳엔 어지러운 그림과 숫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 작업이나 회의를 하다가 "뭔가가 떠올랐을 때" 아무나 쉽게 끼적일 수 있는 아이디어 낙서판이다.

이 디자인실에선 최근 1~2년 새 20여개의 새 제품을 쏟아냈다. 터치 방식 일변도의 트렌드를 과감히 뛰어넘어 회전식 휠을 단 엠피4 플레이어, 초기 화면의 유저인터페이스(UI)를 마치 잡지의 한 페이지처럼 구성한 피엠피(PMP) 등등. 디지털 기기에 '아날로그 감성'을 접목한 것이다. 이들 제품은 올 들어 굴지의 국내외 대기업 제품을 제치고 세계적 권위의 디자인상을 잇따라 수상했다. 유영규 디자인총괄 이사는 "색감은 유럽풍의 화이트와 무채색, 재질은 솔직한 느낌을 주는 솔리드, 기술은 간결한 단순미가 '아이리버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이런 혁신에 힘입어 엠피3·4 플레이어는 국내에서 삼성전자에 내준 1위 자리를 되찾았고, 전자사전은 부동의 1위인 일본의 샤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준까지 올랐다.

한때 전세계 엠피3 플레이어의 절대강자 자리에 올랐던 아이리버는 2005년 국내외 대기업 제품에 밀려 문을 닫을 처지로까지 내몰렸다. 애플·삼성전자 등 '골리앗'들이 시장에 진입한데다 최대 시장인 북미지역의 마케팅 실패가 겹친 탓이다. 재기를 위해 선택한 게 '디자인 올인' 전략이었다. 김군호 아이리버 사장은 "굴지의 기업들과 똑같이 경쟁해서는 답이 나오질 않았다"며 "소리, 냄새, 질감 등 작은 부분까지 소비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디자인에 승부를 걸었다"고 말했다. 2007년 흑자로 전환한 아이리버는 지난해에는 2068억원 매출에 60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루펜리는 음식물처리기의 '냄새 나고 지저분한' 이미지를 '디자인의 힘'으로 단박에 날려버렸다. 신세대 주부를 겨냥해 블랙·레드 색감에 깔끔한 디자인을 선택한 게 주효했다. 이 업체는 5~6개 국내외 경쟁사를 제치고 독보적인 시장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에는 물방울 모양의 가습기와 제습기도 내놨다. 루펜리 관계자는 "생활가전 디자인을 생활소품의 관점에서 보면 새로 개척할 영역이 많다"고 말했다. 6년 전 연매출 8억원이던 이 회사는 지난해 자회사를 포함해 520억원의 매출 실적을 올렸다. 하송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은 "디자인 경쟁력은 투입 대비 효과가 커 자본력이 달리는 중견·중소기업들에게도 고유의 제품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개발 여력이 부족한 소기업들은 디자인을 조금씩 손보는 '리뉴얼' 전략을 쓰고 있다. 기능성 베개를 생산하는 트윈세이버는 지난해 한 디자인 전문회사에 맡겨 기존 베개의 디자인을 개선했다. 색감과 재질을 사이버틱 트렌드로 바꾸고 숙면을 돕는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내장형 스피커도 탑재했다. 옆으로 돌아누워도 목을 편안하게 받쳐주도록 베게 양쪽을 곡선으로 처리했다. 정부 지원금 등을 포함해 디자인 개발비로 1억2500만원을 썼다. 디자인을 개선한 뒤 가격을 꽤 올렸지만 매출은 3배가량 늘었다. 이 업체 관계자는 "촌스러운 꽃무늬 외관을 바꾸고 기술 수준이 높지 않은 기능을 몇 가지 추가했는데 소비자들은 전혀 다른 새로운 제품처럼 받아들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무용품을 생산하는 카파맥스도 저가용 책꽂이 디자인에 변화를 줘 재미를 봤다. 딱딱한 직선 모양을 부드러운 곡선 형태로 바꾸고 회색톤 일변도의 색깔도 다양화했다. 외부 디자인 회사에 들어간 용역비는 3300만원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매출은 2억9천만원으로 전년보다 2배나 늘었다. 이 업체 관계자는 "외부 디자인을 조금 바꾼 것만으로 매출에 이렇게 큰 영향을 끼칠 줄 몰랐다"고 말했다.

한국디자인진흥원이 지난해부터 디자인 개발지원사업을 벌인 16개 중소기업 제품의 성적표를 보면, 디자인 개선 뒤 매출은 평균 53.7%, 수출은 36.9% 늘어났다. 정석표 디자인진흥원 팀장은 "대기업들은 일찌감치 디자인의 중요성을 깨닫고 디자인 부문에 꾸준한 투자를 하고 있지만, 중소기업들은 여전히 투자가 아닌 비용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며 "기술뿐 아니라 디자인을 통해 부가가치를 높이는 경영전략을 적극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회승 기자 honest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