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 개발은 남한에 배치된 주한 미군을 위협함으로써 조기에 미군 철수를 강요하려는 전략 구상에서 비롯됐다. 이후 핵 개발이 진행되는 동안 이 구상은 북한이 유사시 군사적 측면에서 핵무기 보유로 인한 미 증원군의 억제, 한국과 일본을 대상으로 하는 ‘인질외교’ 및 대남 우위의 군사력 확보 등이 추가됐다.
탈냉전 이후 안보동맹과 사회주의 시장 상실에 따른 경제 상황의 악화 등 대내외적 위기에 처한 북한은 ‘체제생존’과 ‘경제회생’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고자 핵 개발을 추진했다. 핵을 수단으로 미국과 직접 협상을 통해 남한에서 미국의 전술 핵 철수는 물론 한미 군사훈련을 중지시켰으며, 경수로 건설과 중유 공급을 확보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그리고 제네바 합의로 핵 동결과 함께 경제 제재 완화, 북미 연락사무소 개설 등 북미 관계 정상화를 추구하는 데 합의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해 핵무기 불위협을 약속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안보 위협을 완화했다. 북한은 핵 문제를 적극적으로 협상에 이용함으로써 미국으로부터의 안보 위협을 완화시키고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제네바 합의의 결과만을 놓고 본다면 두 가지 안보 목표를 모두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북한이 핵개발 초기부터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북한이 적절한 긴장 조성을 통해 안보 위협 해소와 경제적 지원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음을 인식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와중에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면서 미국의 안보 전략은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미국은 자국에 적대적이면서 대량살상무기 개발 능력을 가진 북한을 ‘악의 축’ 국가로 명명하고, 북한을 핵 선제공격 대상국에 포함시켰다. 이에 북한은 강력히 반발했고, 한편으로는 미국이 요구하는 반테러 협약에 일부 가입하는 등 대미 유화 조치를 취했으나 미국은 북한을 신뢰하지 않았다.
2002년 10월 미국 특사의 방북 시 북한은 위기 돌파의 한 수단으로 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핵 개발을 시인함으로써 결국 제네바 합의가 파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북한의 핵 개발 인정은 한 단계 높은 ‘벼랑 끝 외교’였던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군사공격 위협을 이유로 불가침조약 체결을 요구하면서 핵을 비롯한 대북 문제의 동시 타결을 주장했다.
미국은 북한 핵에 대해 핵 개발 계획 폐기는 제네바 합의에 따른 당연한 의무이며, 새로운 협상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유엔을 통해 북한을 제재하려 하자 북한은 ‘핵 억제력을 강화’할 뜻을 내비쳤다. 북한이 주장하는 핵 억제력 강화는 본격적인 핵 개발을 의미한다.
북한의 핵 정책은 북한이 핵 실험을 예고하고, 핵 실험을 강행(2006년 10월 9일)함으로써 최고조에 달했다. 파국으로 치닫던 북핵 문제는 영변 냉각탑 폭파 쇼와 미국의 테러 지원국 해제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 듯했으나, 2008년 12월 11일 북한이 검증 의정서 채택과 시료 채취에 대한 합의를 거부함으로써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김정일은 핵무기가 외부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체제 생존을 보장해 줌은 물론, 북한의 경제 위기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북한 핵문제 해결이 어려운 이유이다. 하지만 북한이 핵을 빌미로 벼랑 끝 외교를 계속하는 한 고립과 파멸을 앞당길 뿐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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