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기 북한의 대남전략은 김일성 유일지배체제 강화를 통한 ‘한반도의 공산화 통일’이었다. 정권을 수립하기 7개월 전에 군대를 창설했고, 내부적 정비가 완료되기도 전에 대규모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그들은 ‘남조선 혁명’이라는 대남 혁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6·25전쟁을 일으켰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도 ‘남조선 혁명’을 적극적이고 공세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이후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과 독일의 통일, 소연방의 해체로 인한 탈냉전기 국제질서의 급격한 변화는 북한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소련과의 동맹체제가 와해되고, 군사원조의 중단은 안보상 큰 위기를 초래했다. 전반적인 정책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해야만 했다.
특히 걸프전을 계기로 재편된 미국 중심의 신국제 질서는 남한과 경쟁관계에 있는 북한에는 큰 부담이었다. 북한은 이러한 상황 변화에 대응해 그동안의 전략목표였던 ‘한반도 공산화 통일’에서 ‘체제생존 및 유지’에 상대적으로 더 치중하게 됐다.한편 내부적으로는 김일성의 사망으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고, 1980년대부터 지속돼 온 경제난은 1990년대 들어 더욱 악화됐다.
설상가상으로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북한은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 들어갔다. 심각한 경제난은 사회불안과 체제 일탈 현상을 가중시켰으며 안보불안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1차 핵 위기로 인한 미국의 대북 압력과 중국의 개방 요구 등 외부로부터의 위협은 김정일 정권이 체제 생존을 걱정해야 할 지경으로 몰고 갔다. 이런 총체적 위기 상황에서 북한은 경제난을 해결하고 체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미국과의 관계개선’뿐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김정일 정권을 신뢰할 수 없는 정권으로 규정하고 북한과의 직접 대화를 거부했다. 북한의 처지에서는 대내외적 도전에 직면해 그야말로 중대한 정책 변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한 셈이다. 결국 체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대안이 군을 앞세운 ‘강성대국 건설’이었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수단이 선군정치였다.
선군정치를 강화하는 측면에서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해 외부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고자 한 것이다. 북한이 처음부터 대량살상무기를 이용해 체제 생존과 경제 재건을 노렸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북한의 핵개발은 대미 관계 정상화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즉, 핵과 미사일은 북한의 정책목표인 ‘체제의 안전 보장’과 ‘경제재건’을 위한 유일한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다.
물론 북한이 생존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북미 관계 정상화는 미국과의 단순한 수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대미 관계 정상화는 ‘체제 생존 확보’와 ‘경제재건’이라는 두 가지의 복합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북한은 “우리나라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위협하는 장본인은 오직 미국뿐이며 그를 제거할 책임과 능력을 지니고 있다.
조선반도 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가장 공정하게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조·미가 대등한 자세에서 직접 회담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해 미국만이 북한 위기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총체적 위기 상황에서 북한이 체제 생존과 경제재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미국을 협상 파트너로 생각한 것이다.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핵을 개발했고, 미국과의 직접 협상을 통해 지금의 난국을 돌파한다는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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